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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자전거 돌리소!
2014-10-17 08:05:02 2014-10-17 08:05:02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연극 <자전거 - Bye Cycle>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전을 재해석해 무대에 올려온 연출가 김현탁이 이번에는 오태석 작가의 희곡 <자전거>에 손을 댔습니다. 김현탁이 고전 원작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한 작품은 <세일즈맨의 죽음>, <메디아 온 미디어>, <열녀 춘향>, <혈맥> 등 다양한데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나 할까요. 이 연출가는 제목만 봐도 원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법한, 고전 혹은 명작을 동시대에 말을 걸기 위한 수단으로 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원작인 명작을 사랑하는 관객이 보기에는 김현탁의 작품을 온고이지신이라고 하는 게 불편할 수 있겠습니다. 원작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순간 곧장 원작은 내팽개치고 자기 식대로 공연화하는 게 온고이지신이냐, 라고 따질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가령 오태석 작가의 희곡 <자전거>를 어떻게 감동적으로 전할까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원작의 논리를 초월해 만든 김현탁식 무대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작의 ‘단물’만을 이용한다는 혐의(?)는 버리셔도 좋습니다. 원작과는 거리가 있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연이 펼쳐지는 데다 사실 관객에게 남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단물이라기보다는 쓴물에 가깝거든요. 콕콕 쑤시듯 박히는 강렬한 감성 혹은 이미지가 그렇습니다.
 
먼저 제목부터 볼까요. <자전거>라는 제목이 <자전거 - Bye Cycle>로 바뀌었습니다. 명색이 한국 연극계의 거장 오태석의 원작을 재창안한 작품인데 말장난 같은 제목이 당황스러우신가요? 놀라시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극장 내 무대 공간에 자전거가 10대나 놓여 있습니다. 배우가 아닌 관객을 위한 자전거이지요. 스스로 원할 경우 관객은 전면을 다 볼 수 있는 객석 대신 이 자전거 객석에 앉아 연극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저도 자전거 객석에 앉아 공연을 봤습니다. 사실, 공연이 진행되는 70분 동안 자전거 바퀴를 열심히 굴려야 한다는 사실은 자전거 안장에 앉고 나서 알았습니다. 자전거 동력으로 공연에 쓸 전기력을 만들어내도록 고안된 까닭에 10명 중 한 사람이라도 바퀴를 굴리지 않으면 공연이 말 그대로 멈춘다는 사실도요.
 
 
◇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
 
어쨌든 자전거 탄 얘기 전해드리기 전에 다시 원작 얘기로 돌아가볼까요. 오태석의 원작 <자전거>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42일 간 결근한 윤 서기가 결근계 초안을 써서 동료 구 서기에게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구 서기는 윤 서기에게 기억이 분명치 않다면서 함께 그 동안의 경위를 추적하지요. 윤 서기는 퇴근길에 만난 동네 어른에게 그 날이 마을의 공동 제삿날로, 6.25 때 등기소에서 마을 사람들이 집단으로 불에 타 처형 당한 날임을 떠올립니다. 또한 그날 자신이 문둥병자인 솔매부부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가출했다는 거위집 둘째 딸의 소식, 거위집 첫째 딸의 솔매 부부 집 방화 소식도 듣습니다.
 
결국 솔매부부 집 방화가 자신의 집안과 관련된 등기소 방화를 상기시키면서 윤 서기로 하여금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의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 것으로 정황상 추정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비극적 역사가 주기를 두고 반복되면서 공동체의 숨겨진 트라우마를 건드린다는 게 오태석 <자전거>의 기본 주제의식입니다.
 
김현탁 연출가는 영리하게도 이 주기를 ‘Cycle’이라고 바꿔 부르고 이 비극적 주기와 이별(Bye)하자고 주문합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작품이 <자전거 - 바이 사이클(Bye Cycle)>. 이음동의어를 즐기는 김 연출가의 재치가 극의 주제의식까지 관통하는 멋진 제목으로 탈바꿈한 셈이지요. 그러나 재미는 여기까지입니다. 김 연출가와 극단 성북동 비둘기가 함께 찾아낸 동시대의 사이클은 다름 아닌 마음 아픈 우리의 현재진행형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극의 표현 방식은 밝지만 다루는 내용은 어둡기 짝이 없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돌리소!"
 
관객이 돌리는 자전거 바퀴의 운동에너지는 환등기의 전기에너지로 환원됩니다. 자전거 바퀴가 돌면 환등기가 돌아가고 자전거가 멈추면 환등기는 꺼져버리는 것이죠. (자전거 바퀴를 거꾸로 돌려도 환등기가 꺼집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제가 해봐서 압니다.) 배우들은 이 불빛 환한 환등기 앞에서 대사를 하고 몸을 움직입니다. 분절된 채 단발마처럼 스쳐지나가는 대사들보다는 배우들의 몸짓과 그림자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대사의 의미 전달이 일차적 목적이 아닌 만큼 연극 초반의 전체적 분위기는 마치 무성영화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데요.
 
오태석의 <자전거> 속 윤 서기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 무성영화 같은 극에 얼마 지나지 않아 구명조끼를 입은 여학생이 등장합니다. 윤 서기와 구 서기와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 외따로 앉은 이 소녀를 보고 관객은 자연스레 세월호 사건을 떠오르게 됩니다. 별다른 대사 없이 있다가 윤 서기가 가까이 갔을 때 소녀가 내지른 외마디 비명이 더욱 뼈 아프게 다가옵니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트라우마가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패턴처럼 반복되는 역사를 다루는 이 극의 컨셉트는 이후 이어지는 배우들의 한바탕 뜀박질을 통해 더욱 분명히 간파할 수 있습니다. 배우들은 이제까지 진행된 올림픽의 금, 은, 동메달의 갯수와 순위를 모두 읊으며 뛰고 또 뜁니다. 세계 열강과 우리나라를 대변하는 이 선수들의 뜀박질은 사실 역사의 흐름을 상징하기 위한 고안치고는 아주 단순한 고안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걸 끝까지 밀어부치는 배우들의 몸, 그 에너지와 힘이 희한하게도 세계사의 우여곡절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합니다.
 
원작 속 6.25 전쟁 직후 트라우마가 동시대의 트라우마로 이어지기까지 몇 단계의 이미지 전이과정을 거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먼저 원작 속 등기소의 화재는 가요 ‘붉은 노을’ 노래의 빨간색 이미지로 대체됩니다. 그리고 다시 ‘붉은 노을’ 노래가 빠른 리듬을 타면서 이윽고 선거철의 흔한 선거운동 현장으로 전환되죠. 흡사 불난 집 같은 선거운동 현장은 다시 ‘엄니, 거기서 나와요. 타 죽어요’라는 원작 속 외마디 대사가 겹쳐지면서
 
이 밖에도 극에는 과거와 짝을 이루는 현재가 대거 등장합니다. 등기소에 불을 지르고 홀로 살아나온 죄책감에 제삿날마다 얼굴에 사금파리를 그어대는 윤 서기의 당숙은 (이 부분은 조금 거친 감이 있습니다만) 오늘날 성형수술로 얼룩진 얼굴로 대체되고, 문둥병자인 솔매 부부의 딸에서 거위집 입양아가 된 두 딸 이야기는 독일 입양아 수잔의 이야기로 대체됩니다.
 
그리하여 비극적 역사와 살아 남은 자의 죄책감이 뒤섞이는 것은 비단 오태석의 <자전거> 속 인물들을 뛰어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이됩니다. 현대예술의 주된 특징 중 하나로 '수행성'이라는 개념이 있는데요. 이것은 관객이 수동적인 관람 방식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관람을 통해 의미의 생산자로서 역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연 중간중간 자전거 객석에서 다리가 아파 발구름이 더뎌질 때마다, 세월호 사건이 벌써 공연에 언급된 것이 조금은 불편하다 싶을 때마다 들려왔던 윤 서기의 외침이 기억에 남습니다. "자전거 돌리소!"
 
이처럼 연극 <Bye Cycle>은 일차적으로는 반복되는 역사의 순환주기를 끊어버리자는 의미로 읽히지만, 다른 의미로는 이 모든 난감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주체인 민중은 계속해서 열심히 역사의 바퀴를 굴려야 하며 동시에 눈 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아, 이 공연의 처음과 나중을 장식했던 가요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의 가사 또한 의미심장했는데요. 역사와 현재를 다룬 공연에서 기억의 흐림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 두 말 하지 않아도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시간 : 2014년 10월 1~12일
-장소 :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소극장
-제작 : 극단 성북동 비둘기
-원작 : 오태석
-창안.연출 : 김현탁
-출연 : 김명섭, 김미옥, 최수빈, 최우성, 이진성, 신현진, 김성혁, 허솔, 안지영, 김진아
-드라마터그 : 목정원
-기술감독 : 서지원
-홍보디자인 : 김지혜
-사진 : 김철성
-영상 : 이창환
-조연출 : 황동우
-기획 : 지대현
-문의 : 02-766-1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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