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자본확충펀드에 10조 원을 투입하는 방안을 놓고 적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다.
한은은 ▲과연 발권력을 동원해 지원할 만큼 `심각한 통화신용 수축기'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지 ▲자금을 공급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지 ▲자금을 투입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놓고 다양한 검토를 하고 있다.
특히 발권력을 동원한 자금공급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남발해서는 안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도 특혜 논란이 일어날 수 있는데다 통화량 팽창은 결국 물가상승을 초래해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권력 동원 보다는 정부가 당당하게 국회의 승인하에 공적자금을 조성해 필요한 분야에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회의 파행이 지속되는 상황이어서 국회의 승인 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쉽게 선택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 한은 내부서도 갑론을박
한은이 애초 밝힌 대로 특수목적법인(SPC)을 거쳐 자본확충펀드에 10조 원을 대출하게 되면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영리기업에 대한 직접 대출이 된다.
한은의 영리기업에 대한 대출은 지금 상황이 `심각한 통화신용의 수축기'라는 판단이 전제돼야 가능하다. 한은법 80조는 금융기관이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며 신규 대출을 억제하는 심각한 통화신용의 수축기에 금통위원 4인 이상의 찬성으로 영리기업에 대한 여신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 영리기업에 직접 대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한은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A 인사는 8일 "최근에 기업어음(CP) 등 크레디트물 금리가 떨어지고 있지만, 금리만 놓고 판단할 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신용경색 현상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한은법 80조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밝혔다.
B인사도 "세계 경제나 국제금융시장의 상황을 보면 통화수축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면, C인사는 "현재 은행들의 대출 잔액이 줄어드는 상황이 아닌 만큼 긴급한 통화수축기를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D 인사도 "한은법 80조를 적용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들어 금융시장 상황이 개선되면서 한은법 80조 적용에 대한 반대 의견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한은의 유동성 공급 조치와 금리 인하 등으로 최근 시중금리는 내림세를 보이고 있다. 91일 물 기업어음(CP) 금리는 지난 7일 기준 6.34%로 작년 말보다 0.15%포인트 하락했고 회사채 3년물(AA- 등급) 금리도 이 기간 0.27%포인트 떨어지는 등 크레디트물도 연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다.
중소기업 대출을 꺼렸던 은행들도 조금씩 자금 공급을 재개할 태세다.
한은 관계자는 "통화신용 수축기는 교과서 상으로 자금을 구하려는 사람은 많은데, 금융기관의 사정으로 자금조달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를 판단할 특정 통화지표가 설정돼 있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금통위원들의 판단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는 한마디로 한은법 80조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할만한 구체적인 하부 규정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국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는 법률 조항이 상당히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적용여부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 전문가들도 의견 엇갈려
전문가들도 현재 상황을 통화신용 수축기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현욱 연구위원은 "시중금리가 여전히 높고 국고채와 회사채 간 또는 신용등급별로 회사채 간 금리차가 커지는 상황은 통화수축기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한은이 관련 법 조항을 너무 보수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도 "상반기에 실물침체의 골이 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은행의 건전성과 자본적정성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며 "이 경우 금융권의 통화신용수축이 현재보다 크게 심각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신 실장은 "단순히 현재 상황을 넘어 금통위가 선제적인 시각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이 정도의 상황이 `심각한 통화수축기'라면 비상 상황인 경우가 상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은법 80조를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또 미래에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한은법 80조를 미리 적용하는 것은 상식밖의 행위라는 의견도 있다.
LG경제연구원의 정성태 선임연구원은 "`극심한'이라는 수식어는 외환위기 또는 전쟁과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최대한 법 적용을 자제하라는 취지에서 붙인 것"이라며 "한은에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반박했다.
◇ 한은, 우회 지원방안 검토
한은은 이런 논란을 피하기 위해 `한은법 80조'를 적용받지 않는 다른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 관계자는 "SPC에 대한 대출이 아닌 우회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통화 수축기인지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국책은행 등 다른 은행을 거쳐 간접 지원하는 방식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해당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을 떨어뜨릴 수 있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되면 해당 은행에 대해 또다른 지원을 해줘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직접 대출한다면 최악의 경우 발생하는 손실을 안아야 한다는 점도 한은에게는 부담스럽다.
한은의 관계자는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라며 "아직 최종 방안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은이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발권력 동원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위기극복에 필요한 조치가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면 당연히 국회의 동의를 거치는 정공법을 선택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국회의 동의라는 절차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국민 전체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는 발권력을 마구 사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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