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경제, 불황인가 경기침체인가
2009-01-01 09:44:13 2009-01-01 09:44:13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 때 백악관 경제보좌관이었던 알프레드 칸은 1978년 경제가 `불황(depression)'으로 빠져들 수 있다고 경고해 경제주체들을 불안케 했다는 이유로 고위층으로부터 호통을 받았다.

그러자 칸 보좌관은 다음번 연설 때는 `불황'이라는 용어를 `바나나'로 슬쩍 바꿨다. "미국이 45년만에 최악의 바나나를 갖게 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식으로.

불황이라는 표현은 경기침체(recession)에 비해 상황이 더 악화됐을 때 사용한다.

둔화(slowdown)보다는 침체가, 침체보다는 불황이 더 강력한 표현이다.

미 경제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 혹은 전후 최장기 경기침체를 겪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속출하고 있지만 불황이라는 표현은 극도로 삼가고 있다.

불황을 피할 수 있다는 확신도 반영됐겠지만 심리적으로 지레 위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배려의 흔적도 엿보인다.

하지만 불황을 '바나나'라는 표현으로 바꾼다고 불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최악의 경기침체라는 식으로 불황이라는 용어 대신 순화(?)된 표현을 쓴다고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최선의 대책을 강구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불황의 정확한 기준은 뭘까?

현재 세계 경제는 경기침체 단계일까, 아니면 그보다 심한 불황에 가까운 편인가?

1일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불황을 진단하는 학술적 논의와 함께 과거의 불황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현재 미국 경제의 위기가 초래된 원인을 따져볼 때 주기적인 경기침체가 아니라 불황에 가깝다는 견해를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경기침체는 통상적으로 2분기 연속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경우로 정의하지만, 미국의 경우 전미경제조사국(NBER,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이 고용과 소득, 산업생산, 도소매거래 등의 지표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경기의 침체 여부를 판단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경기침체와 불황을 구분하는 두가지 범주는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10% 넘게 감소하거나, GDP의 마이너스 성장이 3년 이상 지속되는 경우다.

미국의 1930년대 대공황(Great Depression)은 두가지 범주에 모두 해당한다. 1929∼1933년 미국의 GDP는 30% 이상 감소했다.

이 기준에 의하면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불황이 아니다. 당시 일본의 GDP는 1997∼1999년 고작 3.4%만 줄었을 뿐이다.

2차대전 이후 선진국 가운데 GDP가 10% 이상 감소한 유일한 경우는 핀란드다. 이 나라는 자국의 최대 교역상대국인 소련이 붕괴한 탓에 1993년까지 3년간 GDP가 11% 위축됐다.

개발도상국 가운데는 통상적 의미의 불황에 노출된 사례가 꽤 많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체적으로 매주 거시.미시 경제지표를 산출하는 25개 개도국 가운데 지난 30년 사이에 실질 GDP가 10% 감소한 사례는 13차례로 집계했다.

아르헨티나와 폴란드가 2차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이 90년대 후반 이를 경험했다.
 
러시아는 1990년부터 1998년 사이에 GDP가 무려 45%나 줄었다.

이코노미스트는 1930년대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모든 경기하강을 불황(depression)이라고 불렀으나 대공황(Depression) 이후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 경기침체라는 순화된 표현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이 잡지에 따르면 ANZ은행의 수석 연구위원인 솔 에슬레이크는 GDP의 감소 정도나 마이너스 성장의 지속기간에 의해 불황과 경기침체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경기의 하강을 초래하는 원인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경기침체는 중앙은행이 경기과열을 막기 위해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편 결과로 나타나는데 비해 불황은 자산거품의 붕괴, 신용의 경색, 전반적인 물가의 하락으로 초래된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에 의하면 미국의 1930년대 대공황은 확실히 불황의 범주에 속하지만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불황으로 볼 수 없다. 대공황 때 물가는 25%나 하락했지만 아시아 금융위기 때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90년대 후반의 일본 경제는 명목 GDP가 하락하고 디플레이션이 발생한 점을 감안하면 불황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현재 상황은 어디에 속할까.

지난해 4분기 미국의 GDP는 연율로 따져 6%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0년대 대공황이나 90년대 후반 일본의 경우와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미국 정책당국은 금리인하와 재정지출 확대 등 매우 공격적인 대응책을 펴고 있어 과거와 같은 불황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미국의 경제위기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자산버블과 신용거품이 붕괴하면서 초래됐다.

미국의 이번 자산거품 현상은 1920년대 후반의 미국 상황과 1980년대 후반 일본의 상황보다 훨씬 더 규모가 심각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1930년대 대공황 때 정책당국자들이 금리를 오히려 올리고 은행의 파산을 방치, 사태를 악화시켰던 것을 기억하는 미국 정부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지만 새로운 차원의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경고했다.
[워싱턴=연합뉴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진규 온라인뉴스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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