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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무더기 반대표..의결권 행사 본격화
재계 “신 관치경제 우려” 긴장감..정치적 배경 두고 해석 분분
2013-04-15 14:30:00 2013-04-15 14:32:49
[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국민연금 행보가 심상치 않다. 보유지분을 무기로 재벌그룹 견제의 선봉에 섰다는 분석이다.
 
연기금 특성상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민주화의 궤도 진입은 가시화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면에는 재계에 대한 압박과 길들이기라는 노림수가 숨겨져 있다.
 
◇재벌총수 직접 겨냥.."대립보다는 경고 메시지"
 
국민연금은 먼저 재벌그룹 총수를 직접 겨냥했다. 총수 신변을 최우선으로 하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기업문화를 고려, 정면으로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15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공시한 의결권 행사내역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총 12차례에 걸쳐 재벌 총수들의 이사 재선임 안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현대모비스(012330) 이사 재선임 안을 비롯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SK C&C(034730) 이사 재선임 안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 권익 침해 이력이 있다’는 게 국민연금의 실력 행사 배경 설명이다.
 
나머지 10건에 대해서는 ‘과도한 겸임’이 문제로 지적됐다. 총수 1인이 지나치게 많은 계열사 이사직을 동시에 맡는 것은 경영의 효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게 국민연금 측 주장이다. ‘1인 지배’ 기업구조에 대한 정면 반박인 셈이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이 같은 이유로 각각 롯데쇼핑(023530)롯데케미칼(011170)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이재현 CJ(001040)그룹 회장, 이웅렬 코오롱(002020)그룹 회장 등 4명은 한발 더 나아가 2곳 이상의 계열사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과 적으로 마주했다.
 
다만 국민연금의 반대가 실제 재벌 총수들의 이사 재선임안 부결로 이어진 경우는 단 1건도 없었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지분율을 늘려왔지만 우호 지분 없이 단독으로 막아서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이 가결이 예상됨에도 반대표를 행사한 것을 두고 해당 그룹들과의 정면 대립을 원한 것은 아닐 것으로 추정했다. 경고로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풀이였다.
 
재계 관계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을 예시하며 “총수 일가의 경영상 책임을 묻기 위해 이사 등재를 강조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원칙 없이 엇갈린 주장과 해석을 내놓는 탓에 어떤 방식으로든 지적과 비판은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토로였다.
 
국민연금은 현재 삼성전자(005930) 지분율을 7.19%로까지 끌어올리며 최대주주인 삼성생명(032830)(7.21%)을 바짝 위협하고 있다. 삼성물산(000830)호텔신라(008770), 제일모직(001300)의 경우 국민연금이 이미 최대주주로 올라서는 등 삼성그룹에만 20조원 이상을 쏟아 부었다. 
 
현대차(005380)SK(003600), 포스코(005490), LG(003550), 롯데, 현대중공업(009540), GS(078930), 한진(002320), 한화(000880) 등 10대 그룹에 대한 지분 평가액은 40조원이 넘는다. 이중 포스코와 KT(030200), KB금융(105560), 신한지주(055550), 하나금융지주(086790) 등은 수년째 최대주주 지위를 지켜오고 있다. 가히 시장을 뒤흔들 수 있는 지배자 위치로 올라섰다는 평가다.
 
◇8건 중 1건 꼴로 의안 반대..10% 룰 족쇄 풀려
 
국민연금은 재벌 총수들의 무분별한 이사 재선임 외에도 안건마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총 451차례의 주주총회에 참석해 2084건의 의안 중 12.5%에 해당하는 260건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했다. 8건 중 1건 꼴로 반대표를 던진 셈이다.
 
지난해 전체 의안 중 18.4%에 해당하는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한 것을 감안하면 이 같은 흐름에 뚜렷한 방향성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2008년(5.4%)과 2009년(6.6%), 2010년(8.1%), 2011년(7.0%) 등 예년에 비해 확연이 입장이 강화됐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지난해는 상법개정 문제 때문에 반대 비율이 크게 높아진 측면이 있었다”며 “올해 그런 이슈가 없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반대표 행사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안건별로는 정관 변경이 36.9%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가운데 이사 선임(26.3%), 감사 선임(25.9%), 감사위원 선임(16.2%) 등이 뒤를 이었다. 반대 이유로는 이사 등의 선임의 경우 장기연임이 31.9%, 과도한 겸임이 24.1%, 출석률 미비가 21.6%를 차지했다.
 
재계 입장에서는 그간 중립성을 띠던 국민연금이 사실상 경영권 제한 또는 간섭을 가시화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 그룹사 관계자는 “신 관치경제로 불릴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또 “정부 의지가 없다면 가능했겠느냐”고 반문, 재벌그룹에 대한 압박수단으로 보고 있음을 내비쳤다.
 
한편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는 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됐다. 야권에서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강화와 행사는 경제민주화 실현 차원에서 정당한 수단이라며 반기면서도 일정 시간이 흐르면 원점으로 회귀할까 걱정하는 눈치다.
 
민주통합당 정책위 고위 관계자는 “국민연금뿐만 아니라 검찰과 국세청, 공정위 등 동원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총동원되는 것 같다”며 “최근 10대그룹이 투자와 고용계획을 뒤늦게 발표한 것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면서 “박근혜 정부가 경제위기 극복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만큼 이를 위한 재계의 화답은 필수”라며 “화답이 있고나면 규제완화 등 재계의 입장을 수용하며 타협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의 최근 행보는 바람직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해석이 현재로선 지배적이다. 특히 공적 연기금의 지분보유 한도를 제한해 온 ‘10%룰’(자본시장법 개정안) 개정안이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하면서 족쇄를 풀어준 것은 의결권 행사를 위한 수순 밟기란 분석이다.
 
김한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시장의 발전과 건전한 기업 지배구조 확립 차원에서 의결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며 “총수 일가의 과도한 사익추구로 인한 대다수 주주의 피해라는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이배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회계사는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과도한 정치적 해석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의결권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등 투명성 강화에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명분과 목적에 맞게끔 원칙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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