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유안타증권이 고밸류에이션 논란 속에서도 AI 전력망 빅사이클을 정조준해 과감한 모험자본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1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대원전선은 500억원 규모의 제27회차 무기명식 이권부 무보증 사모전환사채(CB) 발행을 결정했습니다. 이번 CB는 유안타증권이 단독으로 전액 인수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표면이자율과 만기이자율이 모두 ‘0%’라는 점입니다. 투자자인 유안타증권이 이자 수익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심지어 주가 하락 시 전환가액을 낮춰주는 리픽싱(전환가액 하향 조정) 조건조차 없습니다. 이로 인해 대원전선은 해당 사채를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계상할 수 있어 추가적인 재무구조 개선 효과까지 얻게 됐습니다.
이러한 노 리픽싱 조건은 대원전선 사주가의 지분 희석을 방어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도 읽힙니다. 1분기 말 기준 대원전선의 최대주주 측(갑도물산 및 서명환 대표 등) 지분율은 28.54% 수준으로 압도적인 지배력을 갖추진 못했습니다. 향후 주식 전환 시 5%대의 신주가 풀리는 상황에서, 리픽싱으로 인해 잠재 발행 주식 수가 더 늘어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 것입니다.
최근 대원전선이 AI 데이터센터발 전력망 특수로 주가가 급등하며 PBR(주가순자산비율)이 6배 수준까지 치솟아 호재 선반영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이번 제로 금리 투자는 이례적인 정공법(본질 가치 집중) 베팅으로 풀이됩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유안타증권이 현재의 고밸류 리스크보다 전력 인프라 시장의 장기 슈퍼 사이클에 주목한 것으로 봅니다. 미국 중심의 노후 전력망 교체와 AI 데이터센터발 수요 폭증이 일시적 과열이 아닌, 향후 수년간 지속될 구조적 성장기 초입이라는 확신이 깔렸다고 분석합니다.
실제로 유안타증권은 이번 투자를 통해 시세차익을 노릴 전망입니다. 회계상 이 CB는 당기손익-공정가치측정금융자산(FVPL)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향후 대원전선의 주가가 전환가액(1만1650원)을 웃돌 경우, 이자 수익이 없더라도 유안타증권의 파생상품 평가이익으로 잡혀 본업의 이익 상승으로 직결됩니다. 만기 시 원금(100%) 보장은 과감한 베팅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안전장치입니다.
이번 투자는 정부가 추진하는 생산적 금융 및 모험자본 활성화 정책 기조와도 궤를 같이합니다. 그동안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에 쏠려 있던 증권업계의 자금이 국가전략산업이자 고부가가치 제조업인 전선 산업으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유안타증권은 이미 ‘스케일업펀드’, ‘혁신성장형 소부장펀드’, ‘K-바이오백신 펀드’ 등 신성장 산업 육성에 자금을 투입해 왔습니다. 특히 1분기 연결 기준 약 9000억원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외부 차입에 의존하지 않고도 500억원 규모의 투자를 거뜬히 소화할 수 있습니다.
대원전선은 이번에 확보한 500억원 중 345억원을 구리(Cu) 및 폴리에틸렌(PE), 폴리염화비닐(PVC) 등 원자재 구매를 위한 운영자금으로 투입해 가파르게 늘어나는 수주 물량에 대응할 계획입니다. 나머지 155억원은 기존 유이자 은행 차입금 상환에 사용해 이자 비용을 절감하고 재무구조를 개선합니다.
대원전선에 이번 자금 조달은 그야말로 가뭄 중 단비입니다. 1분기 별도 기준 매출은 전년 대비 30% 증가한 1583억원, 영업이익은 무려 176% 폭증한 99억원을 기록했으나 현금이 부족한 실정이었습니다. 밀려드는 주문에 원재료 매입이 급증하며 재고자산이 불어났고, 물건을 팔고도 아직 회수하지 못한 외상값(매출채권)이 1분기에만 163억원이나 급증했습니다. 그 결과 1분기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13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순유출이 3배 이상 커졌습니다. 장부상으론 역대급 흑자인데 정작 금고엔 돈이 마르는 성장통입니다.
운전자금 압박이 얼마나 긴박했는지는 대주주 거래 내역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대원전선은 1분기 중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서명환 대표 등 총수 일가로부터 80억원을 차입했습니다. 이에 따라 1분기 말 기준 총수 일가에 갚아야 할 차입금 잔액은 100억원으로 불어난 상태였습니다. 대원전선은 “경영상 신속한 필요 자금 조달을 위해 투자자의 납입 능력 및 시기 등을 고려해 이사회에서 결정했다”며 이번 투자 유치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총수 일가가 회사의 수백억 원대 은행 차입을 위해 연대보증을 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CB 자금으로 기존 유이자 부채 155억원을 상환하면 사주가의 보증 압박도 한결 덜어낼 수 있게 될 전망입니다.
다만, 향후 주식 전환 청구 기간(2027년 6월18일~2029년 5월18일)이 도래하면 기존 발행 주식 수의 5.3%(429만1845주)에 달하는 신주가 발행될 수 있어, 기존 주주들로서는 향후 오버행(일시적 대량 매물)에 따른 주가 희석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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