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단법인 오늘은 '2026 청년세대 고립보고서')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코로나19의 긴 터널이 끝나고 일상이 회복되면서 세상은 다시 활기를 찾았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고리인 청년세대의 내면은 오히려 더 깊은 고립의 늪으로 침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 ‘물리적 은둔’은 소폭 줄었으나, 타인과의 정서적 지지 체계를 완전히 상실한 ‘정서적 고립’은 도리어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현상은 고립 청년들이 사람과의 연결을 포기한 채 생성형 AI(인공지능) 서비스를 ‘정서적 비상구’로 삼아 스마트폰 화면 속으로 숨어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사단법인 ‘오늘은’이 만 19~34세 청년 4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9일 발표한 ‘2026 청년세대 고립보고서’에서 드러났습니다. 지난 2022년 첫 조사 이후 4년 만에 실시된 이번 추적 조사는 대한민국 청년 고립의 시계열적 변화상과 최근 급부상한 AI 정서 활용 실태를 최초로 정밀 진단했습니다.
꺾이지 않는 ‘장기 고립’의 늪, 취업 전선 밀려난 20대 후반 직격탄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들의 전반적인 물리적 고립 경험률은 2022년 63.3%에서 2026년 50.8%로, 정서적 고립 경험률은 60.8%에서 49.8%로 각각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를 단순한 완화 수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사회적 격리가 강제되던 ‘팬데믹 기저효과’가 사라지면서 나타난 착시일 뿐, 여전히 청년 2명 중 1명은 고립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더 큰 문제는 3개월 이상 방 밖을 나오지 않는 ‘고위험군 장기 고립’ 수치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리적 고립 고위험군은 2022년 13.8%에서 2026년 12.1%로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걸었고, 정서적 고립 고위험군은 오히려 14.5%에서 16.9%로 2.4% 늘어났습니다. 사회적 지원책이 쏟아졌음에도 핵심 사각지대는 전혀 좁혀지지 않은 것입니다.
고립의 직격탄을 맞은 것은 본격적인 사회 진입기에 접어든 만 25~29세 청년층이었습니다. 이들의 물리적 고립 고위험 비율은 15.0%, 정서적 고위험 비율은 18.8%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았습니다. 구직 실패와 이로 인한 무기력감이 고립을 심화시키는 핵심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실제로 구직 의사가 없는 ‘쉬었음’ 청년층의 물리적 고립 고위험군 비율(20.7%)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12.6%)의 1.6배에 달했습니다.
거주 형태별로는 ‘1인 가구’의 위기가 압도적이었습니다. 혼자 사는 청년의 경우 정서적 고위험군과 경계성 단계(1주일 이상~3개월 미만 고립)를 합산한 비율이 무려 46.2%에 육박했습니다. 혼자 사는 청년 두 명 중 한 명은 심리적 고립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셈입니다.
사람에겐 ‘을(乙)’, AI에겐 ‘갑(甲)’, “비밀 지켜주고 눈치 안 봐서 좋아”
사회의 인적 지지망이 끊어진 자리를 빠르게 치고 들어온 것은 기술이었습니다. 고립 경험이 있는 청년들의 72.3%가 생성형 AI를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위로받는 ‘정서 관리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고립 경험이 없는 청년(47.6%)보다 24.7%포인트나 높은 수치입니다.
특히 하루에 한 번 이상 또는 수시로 AI를 찾는 ‘헤비 유저’의 비율은 고립 청년층에서 25.5%로 조사돼, 비고립 청년(12.2%)의 2배를 넘어섰습니다. 고립 청년 4명 중 1명은 AI를 가끔 쓰는 도구가 아니라 매일 감정을 나누는 ‘디지털 반려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고위험군으로 갈수록 이 같은 경향은 극대화되어, 정서적 고위험군의 56.6%는 ‘AI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진짜 친구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했습니다.
청년들이 사람 대신 AI에게 마음을 여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현실에서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줘야 하는 ‘을’이 되는 느낌인데, AI는 내가 맞춰줄 필요가 없는 ‘갑’의 편안함을 준다”는 것입니다.
AI 활용의 가장 큰 장점을 묻는 질문에 고립 청년들은 ‘비밀과 고민을 안전하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41.4%)’, ‘사람보다 눈치나 감정을 맞출 필요가 없어서(40.4%)’를 1, 2위로 꼽았습니다. 비고립 청년들이 주로 ‘즉각적인 대화 가능(42.9%)’ 같은 기능적 편리함에 주목한 반면, 고립 청년들은 타인에게 거절당하거나 비난받지 않을 수 있는 ‘절대적 안전지대’로 AI를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나 오늘 이거 했어, 잘했지?"라며 AI에게 주기적으로 칭찬과 격려를 요청(29.8%)하는 행태도 고립군에서 두드러졌습니다.
1초 답변에 길들여진 청년, 인간의 ‘침묵’에는 못 견뎌
그러나 전문가들은 AI가 제공하는 달콤한 디지털 위로가 고립 청년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는 ‘사다리’가 되기보다, 오히려 현실 복귀를 가로막는 ‘새로운 족쇄’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일시적인 진통제 효과는 확실하지만, ‘방 밖의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성 고립 청년의 36.7%는 “일시적인 위로일 뿐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는다”며 회의감을 표출했습니다.
더욱 심각한 부작용은 실제 인간 관계의 퇴행입니다. 질문하면 1초 만에 완벽한 답변을 쏟아내는 AI의 ‘로딩 없는 소통’에 익숙해진 청년들은 진짜 사람과 대화할 때 발생하는 서툰 공백이나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고위험군 청년의 37.8%는 “사람과 대화할 때 침묵이 흐르면 AI와 비교되며 답답함을 느낀다”고 답했습니다. 사람 간의 정적이나 침묵을 대화의 여백이 아닌 ‘시스템 지연’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리적 고위험군 청년의 32.4%는 “AI에 습관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실제 사람과의 교류가 줄어든 것 같다”라며 두려움을 토로했습니다. AI가 제공하는 무비판적 편안함에 안주할수록, 복잡하고 갈등이 따르는 현실의 사회성을 훈련할 기회는 영영 박탈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차가워진 주위의 시선 “네 의지 부족 탓”, ‘맞춤형 처방’ 서둘러야
이번 조사 결과, 지난 4년간 청년들을 고립으로 내몰았던 주요 원인(실패의 경험, 심리상태,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히 큰 틀에서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요인들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거나 정체된 가운데 유일하게 ‘고립 상태에 대한 자발적 선호’ 응답만이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물리적 고립상태를 자발적으로 선호했다는 비율은 2022년 25.1%에서 2026년 29.5%로 증가했으며, 특히 정서적 고립상태를 자발적으로 선호했다는 비율은 18.3%에서 31.4%로 1.7배가량 증가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가 지난 4년간 은둔 청년 전담 지원 기관을 만들고 예산을 투입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도는 서늘했습니다. 고립 청년의 62.0%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고립 해결 장치가 부족하다”고 응답했습니다. 관 주도의 정부 지원 사업이 작은 예산으로 획일화된 상담 솔루션만 제공하다 보니, 상처받은 청년들의 세밀한 요구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조사 결과, 고립을 경험해보지 않은 비경험 청년의 44.2%는 고립 탈출을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를 ‘자발적 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고립이 깊어진 고위험군 청년들은 내면의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어 스스로 문장을 구사해 도움을 요청할 의지조차 상실한 상태(포기 단계)였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큰 효능감을 준 것은 거창한 정신과 상담이나 개선 의지 강요가 아니라, 좋아하는 무언가에 몰입하는 ‘취미·여가 및 문화활동(29.3%)’과 실질적인 ‘일자리 사다리’였습니다.
포커스 그룹 인터뷰(FGI)에 참여한 한 청년은 “상담 전문가와의 만남은 비즈니스처럼 느껴져 부담스러웠지만, 문화예술 활동은 사교로 느껴져 자연스럽게 소통의 감각을 깨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단법인 오늘은 강국현 사무국장은 “지난 4년간 고립의 원인으로 ‘자발적 선택’을 꼽는 청년이 상당히 늘어난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것이 온전한 자발성인지 아니면 팍팍한 사회 환경에 떠밀린 불가피한 도피인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청년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보여준 따뜻한 관심에 깊이 감사하면서도 획일화된 지원 방식에는 아쉬움을 드러냈다”라며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청년 각자의 고립 기간, 처한 환경, 상처의 깊이에 맞춘 보다 촘촘하고 세심한 맞춤형 지원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고립 초기 단계인 ‘경계성’ 청년들에게는 일자리 정보나 취미 커뮤니티를 제때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는 ‘골든타임’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의지만 탓하는 사회적 낙인을 멈추고, 몸이 갇힌 물리적 고립 청년에게는 ‘일자리’라는 현실적 벽을 허물어주고, 마음이 갇힌 정서적 고립 청년에게는 세밀한 ‘심리 안전망’을 제공하는 맞춤형 정책 설계가 시급해 보입니다.
(사진=사단법인 오늘은 '2026 청년세대 고립보고서')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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