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지유 기자] 금융당국과 금융권이 수년간 '제로 페이퍼(종이 없는 금융)' 전환을 추진해 왔지만 종이 원본 보존 의무에 가로막혀 완전한 전환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디지털 업무 환경이 상당 부분 구축됐음에도 불구하고 일선 현장에서는 종이 문서 보관을 병행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종이 없는 금융' 시행 10년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종이 통장 폐지, 전자문서 확대 등 '제로 페이퍼'가 시행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제도적 기반이 받쳐주지 못한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2015년 '통장 기반 금융거래 관행 혁신 방안'을 통해 종이 통장 축소 정책을 본격화했습니다. 이후 2017년 9월부터 신규 고객을 대상으로 종이 통장을 원칙적으로 발급하지 않거나 고객 요청 시에만 발급하는 방식으로 전환됐으며, 2020년부터는 일부 은행을 중심으로 종이 통장 미발행을 의무화하면서 사실상 선택적 유료화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실제 정책 시행 초기인 2015년 기준 전체 계좌의 약 91.5%가 종이 통장이었지만 이후 신규 계좌를 중심으로 전자통장 전환이 확대되면서 종이 통장 발급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 추세입니다.
그동안 은행들은 저탄소 정책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실천을 내걸고 종이 서류를 없애고 전자창구 시스템을 도입해 왔습니다. 종이 사용량 감소로 인해 목재 소비를 줄이고, 종이 생산 및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을 줄인다는 취지인데요. 은행권 대면 채널에서도 디지털 전환이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영업점에서는 태블릿 기반 전자서식이 도입됐고 설명서와 약관은 온라인 교부로 대체되기도 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전자결재 시스템과 화상회의가 확산되며 종이 사용이 크게 줄었습니다. 일부 은행에서는 종이 통장 미발행 고객에게 금리 우대나 사은품을 제공하고 모바일 통장 전환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이용자 행태 변화도 유도해 왔습니다. 또 종이 없는 점포를 운영하며 창구 업무 전반을 디지털화하는 실험에도 나섰습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이 원본의 법적 보관 의무는 '종이 없는 금융'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상법은 상업장부와 주요 계약서 등을 10년간 보존하도록 하고 세법상 증빙자료 역시 5~10년간 보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근로계약서와 임금대장 등 노무 관련 서류는 3년 보존 의무가 적용되고 있는데요. 세무·회계 자료나 근로계약서는 사후 분쟁 가능성이 높아 보수적으로 관리될 수밖에 없는 영역입니다. 이 때문에 금융사들은 법적 리스크를 고려해 전자문서 외에도 종이 원본을 병행 보관하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원본 개념이 여전히 종이 문서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전자문서가 법적으로 인정되더라도 감사나 감독 과정에서 종이 원본 제출을 요구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이중 관리가 관행처럼 굳어졌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이미 디지털 전환이 가능한 상황이지만 제도적 불확실성 때문에 종이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셈입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전자문서로 작성과 보관된 자료라도 내부 감사나 외부 검사 대응을 위해 별도로 출력해 보관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부 금융사는 디지털 시스템과 종이 보관 창고를 동시에 운영하는 비효율을 감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계대출 관리 강화 등 각종 규제가 강화되는 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재직증명서나 건보료 등 관련 서류는 기본적으로 제출하고 차주 소득을 확인할 추가 증빙 자료가 필요하다"면서 "근로소득 원천징수 영수증 등 구체적인 서류가 필요할 텐데 그게 대출을 취급하는 은행과 담당자마다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서울 중구 NH농협은행 본점영업부에서 한 청년이 주택청약종합저축 통장을 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디지털 문서 원본 인정해야"
전문가들은 금융권 제로 페이퍼 완성을 위해서는 기술이 아니라 제도 개선이 핵심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특히 전자문서가 종이와 동일한 원본 지위를 갖도록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법제처는 실제로 전자문서도 원본으로 인정하는 방향의 법령 정비를 단계적으로 추진해 왔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지난 2024년 27개 법령을 정비한 데 이어 지난해 11개 부처 소관 19개 법령을 추가 개정하는 일괄 개정안을 마련해 국무회의를 통과시켰습니다. 이번 개정을 통해 △법령상 원본 제출 대상에 전자문서를 명확히 포함하고 △행정기관이 전산으로 확인 가능한 경우 별도 서류 제출을 생략할 수 있도록 했으며 △전자문서를 통해 원본 확인이 가능한 경우 종이 제출을 요구하지 않도록 규정을 완화했습니다.
또 전자문서를 보관용 원본으로 인정하고 전자화 문서를 통한 대조도 가능하도록 하는 규정이 신설되면서 그동안 문제로 지적돼 온 '전자-출력-보관'의 이중 절차를 줄이기 위한 제도적 기반도 마련됐습니다. 다만 개별 법령 간 적용 범위와 해석 기준이 여전히 달라 일부 영역에서는 종이 제출 요구가 남아 있어 현장 체감도는 제한적이라는 평가입니다.
은행과 정부·유관기관 간 전자문서 호환 표준을 마련해 출력 없이 제출이 가능한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현재 기관마다 요구하는 문서 형식과 인증 방식이 달라 전자문서를 다시 종이로 출력하는 비효율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로서는 제로 페이퍼로 전환이 진행되고 있지만 법적 기준과 이용자 수요를 고려하면 종이 계약서와 디지털 문서를 함께 인정하고 보존하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특히 종이 문서를 필요로 하는 수요도 여전히 존재해 이를 일괄적으로 없애기는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한 시중은행 창구. (사진=뉴시스)
이지유 기자 emailgpt12@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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