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의 연산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고도화됨에 따라, 이를 뒷받침할 하드웨어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방대한 데이터를 빛의 속도로 처리하면서도 전력 소모는 최소화해야 하는 ‘차세대 메모리’ 기술은 반도체 패권 경쟁의 핵심입니다.
이런 가운데 국내 연구진이 차세대 메모리 소재의 작동 원리를 근본적으로 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KAIST 생명화학공학과 서준기 교수 연구팀은 경북대 이태훈 교수팀과 공동으로 차세대 반도체 소재인 ‘텔루륨(Tellurium, Te)’의 전기적 스위칭 과정을 실시간으로 포착하고 그 메커니즘을 밝혀냈다고 발표했습니다.
AI로 생성한 메모리 전기소자를 순간적으로 녹였다 얼리는 실험 장면. (사진=KAIST)
전자 움직임을 급속 냉각으로 얼려
이번 연구는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비정질(Amorphous) 소재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해, 시행착오에 의존하던 신소재 개발 방식에 명확한 물리적 설계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반도체 메모리의 핵심은 ‘0’과 ‘1’을 구분하는 스위칭(Switching) 기술입니다. 전기가 통하면 ‘1(켜짐)’, 통하지 않으면 ‘0(꺼짐)’이 되는 이 단순한 원리가 수십억 번 반복되며 데이터를 처리합니다. 연구진이 주목한 소재는 ‘텔루륨’입니다. 금속과 비금속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 준금속인 텔루륨은 차세대 메모리 소재로 각광받아왔으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열에 극도로 민감해 전기를 흘려보내면 순식간에 성질이 변해버려, 소자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관찰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연구진은 역발상으로 접근했습니다. 물질을 녹일 정도로 뜨거운 열을 가한 뒤, 찰나의 순간에 급속도로 냉각시키는 ‘온-디바이스 급속 냉각(On-device cryogenic quenching)’ 기법을 고안했습니다. 나노 미터(nm) 단위의 미세한 소자 안에서 텔루륨을 순간적으로 녹였다가 얼려, 원자 배열이 불규칙한 ‘비정질 상태’로 고정시킨 것입니다. 이 ‘유리처럼 굳은’ 상태가 되자, 텔루륨은 비로소 자신의 비밀을 드러냈습니다. 연구진은 이 안정적인 상태에서 전압을 조절하며 스위칭이 일어나는 순간을 초고속으로 포착했습니다.
실험 결과, 비정질 텔루륨의 스위칭은 단순히 전기가 흐르는 단일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연구진은 전압이 특정 임계점을 넘을 때, 전류가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이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우선, 소재 내부의 미세한 결함(Defect)들을 따라 전자가 이동하며 전류 길을 열고, 이후 열이 축적되면서 물질이 국부적으로 녹으며 본격적인 스위칭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즉, ‘결함 주도 전류’와 ‘열 축적’이라는 명확한 인과관계를 밝혀낸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자가 진동(Self-oscillation)’ 현상의 구현입니다. 연구진은 과도한 전류 없이도 비정질 상태를 유지하며 전압이 스스로 커졌다 작아지는 진동 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복잡한 회로 구성 없이 텔루륨 단일 소재만으로도 뇌의 뉴런처럼 신호를 주고받는 ‘뉴로모픽(Neuromorphic) 컴퓨팅’ 소자로의 응용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전기소자 내 액체 상태에서 급속 냉각을 통해 만들어진 비정질 텔루륨의 전기 특성. (이미지=KAIST)
경험적 개발에서 ‘원리 기반 설계’로
지금까지 차세대 메모리 개발은 수많은 소재를 섞어보고 테스트하는 경험적 방식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어떤 전압과 열 조건에서 스위칭이 시작되는가", "어디서 에너지 손실이 발생하는가"를 구체적인 데이터로 제시했습니다.
이는 향후 반도체 엔지니어들이 메모리 소자를 설계할 때, 불필요한 열 발생을 줄이고 작동 속도를 높이는 최적의 값을 계산할 수 있는 ‘설계도’를 확보했음을 의미합니다.
KAIST 서준기 교수는 "비정질 텔루륨을 실제 소자 환경에서 구현하고 스위칭 원리를 규명한 첫 연구"라고 강조하며, "이번 성과가 차세대 메모리 및 스위칭 소재 연구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밝혔습니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이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초 과학의 영역인 소재 물성 연구에서도 의미 있는 진전이 필요합니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는 이번 연구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실렸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