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숨소리)시베리아흰두루미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2025-12-05 10:44:53 2025-12-05 10:44:53
물가에 선 시베리아흰두루미
 
시베리아흰두루미(Leucogeranus leucogeranus, Siberian white crane)를 파주 어느 논에서 만났습니다. 바람이 물 고인 논에 잔주름을 만들 정도로 거세게 부는 날이었습니다. 수초를 파내던 세 마리. 몸 전체가 새하얗고, 접힌 꼬리 사이로 검은 날개깃이 살짝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부리를 진흙 속으로 꽂았다가, 수초 덩이를 물고 흔들며 흙을 털어내고, 다시 고개 숙이며 먹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붉은 얼굴에 노란 눈을 크게 뜨고 정면으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짧은 조우 뒤, 시베리아흰두루미들은 다시 무심히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문득 나는 누구이고, 이 곳은 어디이지 싶었습니다. 답은 곧바로 내릴 수 있었습니다. 파주, 한국입니다. 그렇다면 시베리아흰두루미는 왜 이곳에 있을까요?
 
시베리아흰두루미는 주로 러시아 야쿠티아의 인디기르카 강(Indigirka River) 유역을 중심으로 툰트라 습지에서 번식합니다. 대개 5월에서 8월 사이, 여름 동안 짝을 찾고, 둥지를 만들고, 알을 낳고, 어린 새를 기릅니다. 번식을 마치고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9월 무렵이면 따뜻한 겨울을 찾아 약 5000km에 달하는 긴 이동을 시작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 400km 정도이니 그보다 열두 번은 더 먼 거리를 날아가는 셈입니다.
 
누구든 서울에서 부산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려면 쉼이 필요하고 휴게소가 있듯이, 이동하는 새들에게도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여정에서 숨을 고르고 잘 쉬어갈 수 있는 장소가 꼭 필요합니다. 이런 곳들을 중간 기착지(stopover site)라고 합니다. 시베리아흰두루미의 이동 경로상에도 그런 역할을 하는 거점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러시아 알단 강(Aldan River) 중류의 오홋츠키 페레보즈(Okhotsky Perevoz)는 시베리아흰두루미 무리가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통과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토권생물학문제연구소(Institute for Biological Problems of Cryolithozone Siberian Branch of RAS)의 아나톨리 루킨(Anatoly Lukin) 연구원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2024년 가을에 이 지역을 통과한 시베리아흰두루미가 약 6728마리였다고 합니다.
 
이 중간 기착지에서 몸을 추스른 시베리아흰두루미들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다다른 도착지는 중국의 포양호입니다. 포양호는 계절에 따라 물이 빠지고 차며, 광대한 습지의 모습이 다양하게 바뀌는 거대한 호수입니다. 건기에는 약 1000㎢로 줄어들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에는 수면이 약 4000㎢까지 넓어진다고 합니다. 서울과 비교하면 건기에는 약 1.7배, 우기에는 약 6.6배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이렇게 장대한 규모의 포양호 습지에서 시베리아흰두루미는 오랜 세월 나사말(Vallisneria spiralis) 같은 수생식물의 덩이줄기를 캐 먹으며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긴 건기와 낮은 겨울철 수위, 그리고 수생식물이 감소하며 시베리아흰두루미의 먹이 조건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서식지 이용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습지뿐 아니라 논이나 연꽃밭 같은 경작지에서도 관찰되고 있다는 겁니다. 같은 방식으로 겨울을 나기 어려워졌다는 뜻입니다. 혹시 매번 먹던 겨울 밥상이 달라져, 파주로 찾아오기라도 한 걸까요?
 
파주의 한 습지에 내려앉은 시베리아흰두루미 세 마리. 붉은 얼굴이 가장 큰 튼징이다.
 
시베리아흰두루미는 한때 약 3500마리 미만의 긴박한 멸종위기에 처했지만, 지난 10년 사이 개체수가 거의 2배인 약 7000여 마리로 늘어났습니다.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이러한 개체수 증가는 번식지와 중간 기착지, 월동지로 이어지는 이동 경로 전반에 걸친 보전 협력이 이어진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79년부터 지구상의 시베리아흰두루미 보전에 앞장서 온 국제두루미재단을 비롯해 두루미 보전을 위해 활동하는 여러 NGO들은 여러 나라의 연구자와 지역사회와 협력하며 이동경로 전체의 과제로 다뤄왔습니다. 국경을 넘는 연대야말로 이동하는 새들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포양호가 아니고서는 만나기 어려운 시베리아흰두루미들이 파주로 온 까닭은 개체수가 많아져서 일부가 온 것일까요?
 
파주의 시베리아흰두루미가 반가운 마음에,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흰두루미들은 묵묵히 고개를 숙여 식물을 파내고, 부리에 수초 덩이를 물어 올려 털어내고, 다시 고개 숙이기를 반복하며 먹이를 물 뿐이었습니다. 논길로 차량이 여러 대 지나쳐 갔지만 아랑곳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 접근에 예민한 두루미 종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도 주변 변화에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 모습은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그들은 둔감하거나 경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먹이활동에 있는 힘을 모두 쏟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떤 이유로 왔든 시베리아흰두루미, 환영입니다.
 
부디 시베리아흰두루미들이 파주를 기착지로 잠시 머물다 가든, 도착지로 겨울 내내 머무르든, 어디서든 건강하고 씩씩하게 겨우나기를 마치고 다시 툰드라로 잘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2024년 가을의 중간 기착지 소식을 공유해 준 아나톨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2025년 가을–겨울 이동 중 유럽에서 조류독감으로 하늘나라로 떠나간 4만 마리의 검은목두루미들에게 애도의 인사를, 그리고 파주에서 만난 시베리아흰두루미와 뉴스토마토 독자분들에게 겨울의 안부 인사를 띄웁니다.
 
글·사진= 김용재 생태칼럼리스트 K-wild@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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