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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학폭의 늪, 모두 그렇게 피해자가 된다
2023-07-31 06:00:00 2023-07-31 06:00:00
문화콘텐츠는 죄가 없다. 드라마 ‘더글로리’는 통쾌한 사적제재에 환호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관통했다. 공권력이 불의를 공정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 돈과 권력 앞에 최소한의 권선징악도 실현되지 않는 풍경이 그 원동력이었다. 드라마의 열풍을 두고 ‘사적제재 미화’라고 비판한 일군의 논평이 힘을 얻지 못한 이유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삶은 계속된다. 오늘도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만나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충분치 못한 제도는 그대로이고 문제의 공적 해법은 요원하다. 여기에 서이초 선생님의 안타까운 사망 이후 교권에 대한 논의까지 뜨거워졌다. 가히 학교가 전쟁터에 가깝다.
 
며칠 전 국회에서 진행된 학교폭력 제도개선 간담회는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사안의 뜨거움을 반영한 조치였다. 고등학생 두 분을 포함해 현직 교사, 학폭 심의 변호사, 교육부 관계자, 지역 교육청 장학사 등 학폭 현장의 최전선에 있는 분들을 모셨다.
 
해법은 제각각이었지만 문제의식은 같았다. 현행 학폭 제도는 교육적 해법으로 귀결되기 어려운 제도라는 점이다. 서로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맞폭’이 전체 50%에 육박하고, 반성과 화해보다는 양측의 끝없는 소송전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송 단가가 천만 원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법조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대개 최종심까지 가게 되는 소송이 시작되면 가해자로 지목된 측은 가해 사실을 최소화하는 데에 집중하게 되고 자연스레 성찰과 교육의 시간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참석자 다수가 현행 학폭 제도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고 입을 모은 것은 그 때문이다.
 
입법부의 일원으로서 두 가지를 검토하겠다고 약속드렸다.
 
첫째는 학교폭력 처리에 관련된 법 조항의 구성요건을 정교하게 정비하는 일이다. 현재 위법의 규정이 모호하니 교육적 조정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는 사안도 모두 학교폭력으로 규정된다. 법의 명확성의 원칙이 불충분하면 학생도 교사도 학부모도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간담회에 참석한 교사께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듯 현재 교사들 사이에서는 학생들의 ‘기분상해죄’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지금처럼 이것도 학폭이고 저것도 학폭이면 소통과 공감이 권장되지 않는 무균실의 교실이 될 수 밖에 없다. 국민께서 그런 학교, 그런 사회를 지향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는 학폭 발생 초기부터 전문가 중심의 ‘화해중재단’을 거칠 것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실제 올해 경기도교육청에서 ‘화해중재단’을 적극 운용한 결과, 안성지역교육청의 경우 85% 이상의 사안이 원만하게 해결되고 재발률도 0%에 가까웠다고 한다. 학폭 발생 이후 양측이 만나는 일이 심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얼굴을 맞대고 조정의 시간을 가지면 많은 경우 상식적인 결론이 나온다는 설명이었다. 이를 의무화하면 지금과 같은 소모적인 소송전이 상당 부분 줄어드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언제나 만병통치약은 없다. 학부모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 간담회에 참석한 고등학생께서 제안했듯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토론도 필요하다. 이는 앞으로 적잖은 사회적 논의를 통해 다루어야 할 일이다. 특히 학생인권조례의 경우 사실상 차별금지법을 교육 현장에 입법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해당 의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되어있지 않는 만큼 치열한 논쟁이 불가피할 것이다.
 
사실 교사, 학생, 학부모가 등장하는 학교 내 갈등 양상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에 가깝다. 모든 정치사회 갈등이 법원으로 향하고 있는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 관용과 책임보다 권리 요구의 각축전이 일상화된 결과다. 이를 조율해야 할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무력한 상태이다. 사회규범을 조정하고 합의해야 할 정치의 역할이 사실상 마비되니 주권자는 더 강한 권리 요구와 그에 따른 법적 투쟁으로 갈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큰 송구함을 느끼는 대목이다.
 
어쩌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근본적인 지향점은 자못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정당한 권위에 대한 존중, 나의 권리가 타인의 자유를 해칠 수 없다는 태도, 권리와 자유만큼의 책임 또한 필요하다는 원칙 등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가져왔던, 그러나 어느새 낡은 것으로 치부해왔던 가치들의 회복이다.
 
설명한 덕목들은 보수정치가 지향해왔던 대표적인 가치들이다. 최근 몇 년간 진보적 가치의 총체적 실패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이는 보수적 가치가 성공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보수세력이 진보세력보다 조금 덜 위선적이라고 국민들께서 판단했을 뿐이다. 보수를 자임하는 정치인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다.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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