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응열 기자] 긴급조치 9호에 근거해 체포·구금된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긴급조치 9호가 무효일지라도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 판결이 7년만에 바뀐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30일 A씨등 7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는 위헌·무효임이 명백하고 이 조치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강제수사와 공소제기, 우죄판결 선고를 통해 현실화됐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 발령부터 적용, 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볼 때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으므로 위법하다”며 “긴급조치 9호 적용으로 강제수사를 받거나 유죄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해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청사 전경. 사진/대법원
A씨 등 원고 71명은 1970년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체포·구금됐다가 풀려나거나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된 본인 또는 상속인들이다.
이들은 “긴급조치는 헌법상 영장주의, 표현의 자유 등 국민 기본권을 중대하게 침해한 위헌적 조치”라며 “박전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은 공무원이 직무 집행을 하면서 고의로 법령을 위반한 것이고 이로 인해 입은 손해를 국가는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긴급조치 9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지난 1975년 5월 시행된 대통령 특별조치로,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하는 행위와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이 같은 내용을 보도하는 행위도 막았다. 이 조치를 위반할 경우 영장없이 체포가 가능했고 1년 이상 유기징역도 받을 수 있었다.
이 같은 긴급조치 9호를 두고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3년 “입법목적의 정당성과 방법의 적절성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죄형법정주의에도 위배되고, 헌법개정권력의 행사와 관련한 참정권,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영장주의 및 신체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 국민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한다”며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같은 해에 대법원도 “긴급조치 9호는 발령의 근거가 된 유신헌법에서 규정하는 요건 자체를 결여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이자 유신헌법과 현행 헌법이 규정한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와 신체의 자유, 주거의 자유, 청원권, 학문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해 국민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위헌·무효”라고 판단했다.
이후 긴급조치 9호에 근거해 체포·구금된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인 지난 2015년 대법원은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며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행사는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며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을 부정했다.
이번 사건의 하급심도 이 같은 대법원 판결을 이유로 A씨 등의 국가배상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형벌에 관한 법령이 헌재의 위헌결정으로 효력을 상실했거나 법원에서 위헌·무효로 선언된 경우, 법령이 위헌으로 선언되기 전에 그 법령에 기초해 수사가 개시돼 공소가 제기되고 유죄판결이 선고됐더라도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항소심 재판부도 A씨 등의 항소를 기각해 1심 판결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에 대법원이 기존 판례를 바꾸면서,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이 온전히 국가 배상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현재 긴급조치 9호에 따른 수사·재판을 원인으로 진행 중인 소송은 대법원 약 24사건, 하급심 약 9건이다.
다만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 이전에 손해배상 청구가 기각돼 확정된 피해자들이 새로 소송을 제기해 구제를 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전원합의체 판결이 소급적용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로 기존 판례를 변경해, 과거 행해진 국가 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에 대해 사법적 구제를 인정했다”며 판결의 의의를 설명했다.
김응열 기자 sealjjan1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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