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지산지소'와 '세제 패키지'
2026-05-26 06:00:00 2026-05-26 06:00:00
해 질 무렵 열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지방 풍경을 요즘은 자주 본다. 끝없이 이어진 논밭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자연 경관과 함께 드문드문 서 있는 송전탑들도 붉은 노을을 등진 거인의 형상을 닮아 있다.
 
매일 그 탑들이 실어 나르는 에너지를 빌려 도시의 불을 밝히고 스마트폰을 충전하는 등 우린 첨단 문명을 누린다. 매일 아침 전등 스위치를 켜고 노트북을 열 때 쓰는 전기가 저 멀리 외딴 바닷가나 산골짜기 바람, 햇빛으로부터 거슬러 온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혈처럼 국토 전력망을 타고 흐르는 에너지,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의 가장 깊숙한 곳을 지탱하는 문명의 혈류가 됐다. 하지만 이 유려한 풍경의 이면에는 웅크린 고뇌와 마찰의 지청구가 서려 있다.
 
30년 전만 해도 ‘햇빛과 바람으로 어떻게 거대한 첨단 공장을 돌리냐’며 손가락질 받던 재생에너지는 이제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경제적 무기가 되고 있다. 정부도 문명사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기에 기존 신재생에너지 공급 의무화(RPS) 제도를 전면 폐지하고 ‘장기 고정가격 입찰 시장’으로 일원화하겠다는 메스를 꺼냈다. 
 
매일매일 널뛰는 전력도매가격(SMP)과 공급인증서(REC) 가격의 불확실성을 제거, 현 원자력발전소보다 두 배 이상 비싼 재생에너지 단가를 떨어뜨리겠다는 신호다. 하지만 전력 시장의 제도를 바꾸고 가격 신호를 다듬는 일은 단순히 모니터 위의 숫자만 조정하는 기술적 영역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토의 공간을 재배치하고 고사해 가는 지방을 살리며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을 어디에 심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고도의 정치경제 영역이다.
 
그동안 우리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곳과 소비하는 곳을 분리해 왔다. 위험을 감내하는 지방의 희생 위에 수도권의 화려한 첨단산업은 꽃을 피웠다. 하지만 장거리 송전망 건설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시대를 맞고 있다. 
 
발전소 바로 옆에 공장을 붙이는 ‘지산지소’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법인 된 셈이다. 지방의 풍부한 햇빛·바람, 원전 근처로 반도체 라인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밀어 넣어야만 막힌 전력망도 숨통을 틀 수 있다.
 
이번 법안 통과로 도입될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는 이 거대한 이주를 가능하게 할 첫 단추로 읽힌다. 그러나 냉정하게 짚어야 할 대목은 전력 가격 차등화라는 마중물 하나만으로 기업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
 
진정한 지산지소의 완성은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손을 떠나 예산당국이 쥐고 있는 세제 혜택의 빗장을 푸는 2단계 고차방정식으로 진입해야 한다. 기업을 유인할 ‘법인세 감면’, 청년들의 발길을 돌릴 ‘소득세 혜택’, 그리고 지역사회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정주 인프라 지원’이 하나로 밀접돼야 한다.
 
에너지 대전환에 시동을 걸었다면 예산당국은 보급과 규제 완화의 길을 닦아줘야 할 때다. 말로만 대전환을 외치며 실질적인 재원과 세제 지원의 문을 닫아거는 모순은 끝내야 한다. 100GW의 이정표는 단순히 전력량의 숫자를 늘리는 게임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향한 출사표가 돼야 한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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