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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벌의 뿌리)②민족자본 두산, 알고보니 원조 부일…신세계·효성·현대도 부일 흔적
내선일체 주장에 항일투쟁 성토까지…해방 후에는 민족자본가로 '둔갑'
2015-11-18 07:00:00 2015-11-18 07:00:00
1896년 창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 기업으로, 119년 역사를 자랑하는 최고(最古) 기업. 두산그룹 홈페이지에 소개된 그룹의 역사다. 창업주 박승직(1864~1950)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구적 기업가이자, 민족 자본가로 알려져 있다. 박승직은 1896년 서울 배오개(지금의 종로 4가)에 국내 최초의 근대식 상점 '박승직상점'을 열었다. 두산의 전신이다.
 
박승직은 팔도를 떠돌던 보따리 장사부터 시작, '배오개의 거상'으로 성장했다. 1907년에는 1300만원의 일본 차관을 상환하기 위해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70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두산은 2009년 이전까지 박승직에 대해 "기업을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민족의 힘으로 키우고자 하였다"며 "발전하는 나라, 한국의 힘이 되어온 민족기업, 바로 두산"이라고 규정했다.
 
◇2009년 이전까지 두산그룹은 스스로를 민족자본으로 홍보했다. 사진/2006년도 두산그룹 공식 홈페이지 캡쳐
 
구체적으로는 "1905년 일제의 화폐개혁에 맞서 동대문시장 상인들로 구성된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06년 한성상업회의소 설립에 참여했는데 이는 훗날 대한상공회의소의 효시가 되었다"고 말했다. 박두병 회장을 시작으로 박용성 회장을 거쳐 현재의 박용만 회장까지, 그의 후손들이 대한상의를 이끄는 배경이 됐다.   
 
두산의 이런 긍지와는 달리 학계에서는 박승직을 대표적인 부일 기업인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1919년 친일 단체인 조선경제회 이사를 시작으로 1922년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을 지낸 것이 드러나면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특히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방응모, 서정주, 김활란 등이 참여한 친일 단체로, 태평양전쟁 중 조직된 대표적 선전 조직이다. 
 
그는 또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수차례나 총독부를 방문해 국방헌금과 위문금을 냈고,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을 옹호하며 조선인의 학도병 지원을 적극 독려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그의 활동상이 잘 소개돼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1월10일자를 보면 '국가 대방침 아래의 충성된 실천자로서'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박승직은 이 기사에서 "지나사변(중일전쟁)이 발생한 책임은 중국에 있다"며 "상부상조의 미덕으로 동양의 평화를 지켜야만 될 민족으로서…(중략) 항일정책을 하고 있는 것은 자기동포를 제가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1937년 11월10일자 매일신보. 박승직은 중일전쟁의 발발 원인을 중국에 돌리며 일본을 옹호하고 있다. 자료/한국언론진흥재단
 
그는 이듬해 2월2일 같은 신문에 실린 '두 손 들어 축하'라는 기사에서는 "조선인에게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게 된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며 "(이는)내선인의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며, …(중략) 앞으로 조선인도 제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 것을 경축한다"고까지 말했다. 
 
또 두산그룹 홈페이지에 소개된 그룹의 역사에는 박승직상점이 1925년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으로 이름을 고친 후, 해방 직후인 1946년 박승직의 아들 박두병이 '두산상회'로 사명을 바꿨다고 돼 있다. 지금의 '두산'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빠진 게 있다. 박승직은 1941년 자신의 성을 미키(三木)로 창씨한 뒤, 박승직상점을 미키상사로 바꾼 바 있다.
 
◇1938년 2월2일자 매일신보. 박승직은 일제시대 조선인 학도병 제도가 실시된 것을 '두 손 들어 축하'라고 환영하고 있다. 자료/한국언론진흥재단
 
신세계그룹 뿌리에도 부일의 흔적이 있다. 물론 신세계의 재원은 삼성(이병철)으로부터 출발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를 보면, 정용진 부회장의 조부인 정상희(1907~1981)는 충북 충주 출신으로 1935년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총독부에서 사회교육과장 등을 지냈다. 또 당시 친일 체육회인 조선체육협회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이후 정상희는 기업가로 변신, 해방 후에는 삼호무역 부사장, 동화통신 부사장을 지냈다. 1958년부터 1964년까지는 4·5대 국회의원(충청북도 중원군)으로 활약하는 등 정계에도 투신했다. 이후 삼성물산 사장, 동방생명보험 회장 등 최고경영자 반열에 올랐다. 
 
신주백 연세대 연구교수에 따르면, 1919년 결성된 조선체육협회는 총독부 학무국장이 당연직 회장을 맡고 협회 본부를 학무국 사회체육과에 둘 만큼 총독부 산하 기구 성격이 짙다. 정상희는 1940년 조선체육회를 사임, 만주에 있는 대련만주 기계유공업주식회사로 적을 옮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총독부가 송별회를 열어줄 정도로 각별히 챙겼다. 이를 근거로 1949년 쓰인 <민족정기의 심판>에서는 정상희를 부일 행위자로 규정했다.
 
◇1940년 1월17일자 동아일보. 조선체육협회에서 물러나는 정상희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자료/국사편찬위원회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는 1929년 보통문관시험에 합격, 경찰에 입문했다. 이후 전남 순천과 장성, 해남, 보성 등에서 경부보를 지냈다. 대림그룹은 창업주 이재준의 부친 이규응이 일제시대 경기도 시흥군 남면에서 면장을 지냈고, 이재준의 형인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총독부가 세운 금융조합(지금의 농협)의 이사로 활동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일제시대 금융조합을 연구한 최재성 청암대 연구교수는 "일제는 지주나 명망가들을 금융조합 간부에 앉히고 수탈을 합리화했다"며 "금융조합 이사는 조선 총독이 임면한 사람들로, 금융조합을 실질적으로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또 "면장·면서기 등은 현장 최일선에서 조선인을 수탈한 사람들"이라며 "다만 그 수가 많아 친일인명사전 등재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남 함안의 지주 출신으로 효성그룹을 창업한 조홍제는 1926년 6·10 만세운동에 참가해 수감되는 등 항일정신이 강했다. 성인이 되면서 행보는 확연히 엇갈린다. 1936년 고향인 군북면에서 금융조합장에 당선돼 해방 전까지 3선 조합장을 지냈다. 또 1940년 1월9일 매일신보에 실린 '축 황기 2600년 신춘' 광고에 이름을 올리는 등 일제에 대한 협력으로 태도를 바꾼다. 이 광고는 일제 천황가 탄생 26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 동·하계 올림픽 개최와 함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선전전으로 활용됐다. 
 
◇1940년 1월9일자 매일신보.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는 당시 경남 함안군 군북면 금융조합장 자격으로 일제 천황가 2600주년을 축하하는 광고에 이름을 실었다.(사진 속 빨간색 표시) 자료/한국언론진흥재단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는 1923년부터 10년간 경북 포항 일대에서 산림조합 기수보를 지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산림조합 기수보라고 하면 권력이 있는 직책이어서 아무나 취직할 수 없었다"며 경북도 평의원이던 친척의 추천으로 도지사를 만나 면접을 보고 산림조합에 취직, 영일군수 밑에서 일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원만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피복류 공장을 설립,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군수품 공장으로 지정돼 물자를 납품하면서 사업 기반을 닦았다.
 
최병택 공주교대 교수는 "산림조합은 군수가 조합장을 겸임했고 산촌민을 벌할 수 있는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다"며 "농민들은 자신이 소유한 산에서 임산물을 채취하려 해도 산림조합 허가를 받고 과도한 수수료를 내야만 해 반발이 컸다"고 말했다.
 
재벌의 직계 선대는 아니지만 외가 쪽으로 부일 이력이 있는 경우도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경우가 대표적이다. 현 회장의 조부인 현준호(1889~1950)는 호남의 대지주로, 호남은행장을 지냈다. 그의 부친 현기봉은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일제에 협력했고, 현준호도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됐다. 이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총독부 주최 시국강연에서 전쟁 지원과 징병제 홍보, 학도병 지원 등을 주창했다. 현기봉과 현준호는 부자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대표적 친일 가문이다.
 
효성도 조석래 회장의 장인 송인상(1914~2015)이 1935년부터 해방 때까지 조선식산은행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식산은행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지배를 받은 곳으로, 신용기구를 통한 착취와 약탈을 감행하기 위해 만든 은행이다. 송씨는 해방 이후인 1952년 한국은행 부총재, 1959년에는 재무부 장관을 지내며 경제계에 막후 실력을 행사했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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