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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장'…사고 10건 중 9건 '은폐'
하청 노동자, 산재 신청도 못해…원·하청 구조적 한계
산재 은폐로 ‘엉터리 통계’…반복되는 산업재해 악순환
2015-05-26 10:00:00 2015-05-26 10:00:00
“지난해 7월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 Q204 앞 야드에서 440V(볼트) 변전기 분리작업 중 전기 폭발 사고로 손등과 손가락, 머리와 목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충격 때문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오른쪽 팔의 감각을 잃었습니다.”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인 장남재(가명)씨는 작업 중 사고로 산업재해 신청을 검토하다, ‘한번 살려 달라’는 회사(하청·신호ㅇㅇㅇ) 측 호소에 마음이 흔들렸다. 산재 신청은 원청과의 재계약에서 감점요인이 되기 때문에 하청 입장에서는 결사적으로 막게 된다. 아내와 어린 자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뒤 사측의 태도는 돌변했다. 완쾌 때까지 진료비와 휴업 손실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사고 당일부터 현재까지 1000만원을 쥐어준 게 전부다. 심지어 기숙사에서도 쫓겨났다. 회사를 나가라는 얘기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면서 가정은 파탄 났다. 장씨는 직장과 건강, 가족마저 잃었다.
 
이처럼 조선, 철강, 건설플랜트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 분야에서는 제도적·구조적 위험요인 탓에 산업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곳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산재가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원·하청의 갑을 관계 속에 하청 노동자들은 다쳐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실정이다.
 
지난 14일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사무국장을 만나 울산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산재 은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사진/뉴스토마토)
 
취재팀은 지난 14일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사무국장과 정동석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지회 노동안전부장을 만나 울산지역에서 암암리에 행해지는 산업재해 은폐에 대해 오랜 시간 설명을 들었다.
 
현 사무국장은 “2012년 울산 동구청 비정규직센터, 2013년 현대중공업 원·하청 노조, 2014년 인권위 등 4곳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산재 은폐’가 평균 93% 이상 자행되고 있다”면서 “각기 다른 조사였지만, 결과는 비슷했다”고 말했다. 이어 “산재 처리한 비율이 7% 정도에 불과했고, 현대중공업 노조 조사결과에서는 3.7%로 더욱 낮아졌다”면서 “산재 은폐는 원·하청을 불문하고, 우리나라 노동자의 90%가 해당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해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를 보면 근로자 403명 중 77명이 작업 중 사고로 최근 3년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산재 처리는 3.7%에 불과했다. 43.7%는 공상 처리했고, 50.4%는 개인비용으로 치료비를 부담했다.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지회에 따르면, 지난 2013년 2차(3월12일~22일) 조사에서 총 106건(정규직 9건, 하청 97건), 2013년 3차(9월9일~16일) 조사에서 25건의 산재 은폐가 적발됐다. 2014년 4차(3월)와 5차(6~8월) 실태조사에서도 각각 83건, 32건의 은폐 사실이 확인됐다.
 
올해 실시한 6차 실태조사(4월20일~30일)에서도 62건의 산재 은폐가 드러났다. 지난해에만 9명의 하청 노동자가 사망했지만, 실상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동석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지회 노동안전부장은 “산재 은폐는 현재 진행형으로, 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눈에 띄는 건 이주 노동자의 산재 은폐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주 노동자 취업수가 늘면서 산재 은폐 사례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위험한 업무를 이들에게 맡기면서도, 정작 다치거나 죽는 사고가 발생하면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방치되고 있다.
 
특히 이번 조사가 일정 기간, 현대중공업 인근 10여 곳의 지정 병원만을 대상으로 실시했다는 점에서 숨겨진 산재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동석 노동안전부장은 이른바 ‘1대 29대 300’의 ‘하인리히(Heinrich) 법칙’을 예로 설명을 이어갔다. 1건의 사망사고가 나기까지 29건의 사고와 300건의 위험이 발생하지만, 이 같은 경고음에도 사측의 안전관리는 태만하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숨기기에만 급급한 데다, 여론의 일시적 비난만 견디면 또 다시 과거 행태로 돌아간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가 조사한 산업재해 은폐.(자료/현대중공업 하청지회)
 
지난 3년간 17명의 하청 노동자가 사망하면서 ‘죽음의 공장’이라는 오명을 쓴 현대제철 역시 산재 은폐가 비일비재하다. 현대제철 노조 관계자는 “당진제철소는 원청(4000여명)과 하청(1만200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면서 “공장마다 무재해 150일, 200일 등의 기념비적 문구가 걸려 있지만, 하청 노동자의 사고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원청 3배에 달하는 하청 노동자는 대부분 조업과 기계 보수 등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높은 업무에 집중돼 있다. 때문에 이들을 사고 통계에서 배제한 가운데 집계한 ‘재해율 제로’는 의미가 없다.
 
심지어 고용노동부 특별근로감독관이 해당 사업장에 상주한 기간에도 사망사고가 두 차례 났을 정도라며 이 관계자는 혀를 찼다. 그는 “현대제철은 하청 노동자들에게 살인기업으로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지만 연간 수백억원씩 산재 보험료를 감면받고 있다”면서 “사고가 나도 하청 노동자의 경우 조직화돼 있지 않아 개인이 까다로운 절차에 따라 산재를 신청하고,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안전 불감증’은 현행법이 원청 사용자에게 직접적 형사책임을 묻기보다 벌금 등 처벌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난 5년간 대기업의 산재 은폐로 재해율, 산재 보험료율이 증가하지 않아 보험료 감면만 약 5조원에 달한다"면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등 기업에 대한 산재 관련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영택·이순민 기자 ykim98@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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