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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어주는기자)자주와 독립을 향한, 끝나지 않은 여정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오카모토 다카시 지음 | 강진아 옮김 | 소와당 펴냄
2014-12-24 08:40:23 2014-12-24 08:40:27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 말은 그저 지도상 위치를 표현하거나 아니면 남북으로 갈린 한반도의 현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수식어 정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또는 한국의 입장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시기와 맞물려 ‘국토를 유린당한’ 이유를 집약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명쾌한 구절’로써 애용되기도 한다.
 
이같은 피상적이고 결과론적인 서술방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한반도 위기의 근본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는 사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픔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역사적 관점에서 지정학적 중요성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원제 : <세계 속의 한, 중, 일 관계사-교린과 속국, 자주와 독립>)은 그 첫걸음을 떼는 데 좋은 촉매제가 될 만한 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자는 일본인인 오카모토 다카시 교토부립대학 교수다. 일본인 학자가 16세기부터 러일전쟁 직전까지의 동아시아와 한반도, 세계열강을 다룬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게 사실이다. 원래 일본인 독자를 상대로 쓰여진 이 책은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인 독자가 보기엔 다소 불편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사료를 바탕으로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하려고 한 점, 역자 강진아 경북대 교수의 꼼꼼한 주석과 의견이 덧붙여진 점 덕분에 책은 그 시각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동시대인도 곱씹어볼 만한 역사적 통찰력을 제공하는 데 성공한다.
 
이 책의 재미는 ‘속국 자주’와 ‘독립 자주’라는 키워드 아래 한반도를 바라보는 각국의 미묘한 입장차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했다는 점이다. 특히 풍부한 사료를 근거로 한 치밀한 논증이 흥미를 끈다. 또 다른 재미로는 교과서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 중심의 역사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역사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는데 이는 저자가 역사의 현장에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시한 인물들을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각국의 입장에도 서보고, 한반도를 향한 동아시아와 세계 열강의 입장 차도 감지해 보다보면 어느새 독자의 생각은 현재 한반도 현실에 미치게 된다. 누구보다도 외교와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책의 내용에 온전히 동의하느냐 여부와 상관 없이 거시적인 안목에서 한반도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 전략을 모색할 동기를 제공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 전문성 : 방대한 사료를 자기의 것으로 소화한 역사학자의 책. 중국사와 조선사, 일본사를 치밀하게 공부한 학자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 대중성 : 학술적이지만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책이다. 갑신정변, 아관파천 등을 공부한 고등학생 정도라면 충분히 재미 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 참신성 : 저자는 한 국가 입장이 아닌 관계사적 시각에서 역사를 기술한다.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역사적 데이터의 의미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요약
 
프롤로그
 
저자는 책의 본격적 논의를 전개하기에 앞서 1896년 2월 11일을 언급한다. 이 날은 조선의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이 광화문 밖에서 군중들에 에워싸여 타살된 날이다. 친청과 친일 사이를 오고가다가 마지막에는 '친일파'로 낙인 찍혀 학살된 김홍집의 기이한 인생을 설명하며 저자는 그 이면에 동아시아 역사의 동향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한다. 
 
종속 관계
 
저자는 우선 조선왕조의 대외 관계를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건국 당시부터 명과 깊은 관계에 있었던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모든 대외관계의 근간으로 삼는다. 명을 향해서는 사대의 관계를, 당시 나머지 이웃나라인 일본, 류큐(오키나와 현에 있던 옛 왕국), 주션(여진족)에 대해서는 교린의 관계를 유지한다. 즉 중화 왕조를 향해 예를 갖추고, 나머지 주변국은 이적으로 구분해 제한적으로 교류하는 독자적인 대외 관계를 펼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 세계는 대항해시대로 접어들었고, 그 영향이 극동 각국에 미치면서 조선의 대외 관계도 심한 부침을 겪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편 일본은 16세기 후반까지 세계사에서 그 존재가 미미했다. '오닌의 난' 이후 신흥세력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또 16세기 일본열도의 광산 개발과 금은 생산로 인해 부력과 무력이 팽창한 것이 일본의 부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에너지 분출의 결과가 왜란이다. 일본의 공격을 받은 조선은 명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은 '교린 관계의 파탄을 사대 관계로 구제'할 수 있었다.
 
호란은 명대에 급부상한 여진족의 조선 침입을 말한다. 당시 조선은 여전히 명의 입장에서 여진족, 즉 청을 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심하여 대패하게 된다. 호란 이후 청과 조선의 관계는 '형제'의 관계로 변한다. '형제라는 명분'은 '교린'이고, 명에 대한 '사대'도 유지한다는 것이 조선의 대외관계였다는 게 저자의 요지다. 당시 명이 여전히 강성한 상황이었므로 청도 이 상태를 받아들였다. 저자는 이러한 청과 조선의 관계를 명과 조선의 '종번(왕과 신하)' 관계와 구분하고자 '종속' 관계라 칭한다.  
 
그러다 1644년 명이 느닷없이 멸망하면서 청이 중국에 군림하게 된다. 이 명청 교체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세계 질서의 전환처럼 여겨졌다. 중화가 이적이 되어버렸다거나 혹은 이적이라도 중화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은 동아시아의 세계관을 근본부터 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각 국가에 자립성과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동아시아의 국면이 안정적일 때를 제외하고는 이제는 종속 관계도 교린 관계도 고정불변의 것이 될 수 없게 된다. 
 
속국 자주의 형성
 
17세기 중반 동아시아에서 성립한 새 질서, 그리고 상호관계는 각국의 정권 안정과 맞물려 19세기 중반까지는 파탄 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위험도 내포하고 있었다. 조선과 일본의 경우 대등한 교린 관계였지만 각자의 군주 지위 중 누가 높은가의 문제 등 명분상의 분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에 조일 쌍방은 어휘에 대해 자기 형편에 좋게 해석을 붙임으로써 분규를 피했다. 이같은 임기응변은 당시만 해도 쓰시마번을 매개로 한 극히 일부의 교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청과 조선의 관계에서 청은 조선을 종속 관계로 보았지만 조선의 속내는 달랐다. 조선은 명이 없어진 이상 중화의 정통을 잇는 것은 조선 자신밖에 없다고 보고 계속해서 명을 숭모하는 자세를 유지한 것이다. 이처럼 청과 조선 역시 서로 다른 속내를 품고 있었지만 서로 조심스러워 하며 깊이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평화를 유지했다. 청과 일본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평화로웠다. 청은 왜구와 같은 해상의 군사적 위협을 두려워 하고, 일본은 그리스도교의 유입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둘은 직접 교섭하는 대신 조선을 통해 교섭했다.
 
하지만 19세기의 서양 진출은 청, 조선, 일본에 각각의 파문을 일으켰다. 청은 아편전쟁, 애로호사건을 겪으며 근대 서양의 국제 관계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들어가게 된다. 일본 역시 미국의 페리호 제독의 내항 이후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과 연이어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반면 이 시기에 조선만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대응했다. 거꾸로 서양에 대한 적대 의식을 높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설립,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이 그 예다.
 
이런 가운데 조선과 청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면 그 행위도 청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청은 '조선은 사실상의 독립국이고 일체의 국사는 자주적으로 한다'고 답한다. 한편 조선은 프랑스, 미국의 조약 체결 요구에 대해 거절하며 그 근거로 '청의 속국'이라는 지위를 든다. 이렇듯 당황스러운 상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이 무렵 공교롭게도 조선과 일본 관계도 어긋나기 시작한다. 메이지유신을 이룬 일본은 왕정복고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천황의 호칭 문제가 대두돼 조선과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운요호를 앞세워 일본이 무력시위를 일으켰고 결국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이런 가운데 일본에 대한 청의 위기감 또한 고조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일본이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으로 만들면서 청의 위기감은 정점에 달했다. 청 입장에서 류큐번은 자신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또한 이 같은 전철을 밟게 하지 않기 위해 청은 조선과 서양 각국의 조약체결을 추진했다. 조선이 서양 열강과 조약을 맺는다면 일본이 가벼이 조선에 손을 뻗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약들에 대한 청과 조선의 입장은 모순을 품고 있었다. 청의 입장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면을 중시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의 입장은 각국과 대등한 관계가 되는 '자주'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청과 일본은 앞다퉈 서울진군에 나선다. 먼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일본인 살해 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항의로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했으나 교섭에 실패해 물러나고, 그 직후 청은 일본군 대신 진군해 대원군을 납치해 중국으로 보내고 민씨 정권을 부활시킨다. 이렇듯 '속국 자주'를 주장하는 청에 대해, 그 직접적인 표적이 된 일본, 서양 열강, 조선은 모두 의심하기 시작한다.
 
속국 자주의 전개
 
임오군란 후 조선 정계는 분열한다. '속국'과 '자주'의 개념과 대처를 둘러싸고 사대당과 독립당이 극단적으로 대립한 것이다. 청이 속국을 구실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자 김옥균, 박영효로 대변되는 독립당, 즉 급진 개화파는 청에 반대하며 사대당을 살상하고 정권을 탈취하는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그러나 청의 개입으로 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청군 덕택에 민씨 정권이 다시 부활한다. 이 가운데 민씨 정권은 청이 원수지간인 대원군을 끼고 있으므로 청에 대한 혐오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이리하여 조선 정부는 노골적인 반청, 친청 어느 것도 아닌 '자주' 노선을 모색하게 된다. 
 
이즈음부터 조선은 전에 없이 많은 나라와 관계를 맺게 된다. 청은 그 외교 실무를 담당할 사람으로 묄렌도르프를 발탁한다. 그런데 묄렌도르프는 되려 조선이 청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대안으로 러시아를 택해 비밀리에 조러밀약을 추진한다. 청에 발각돼 무산되긴 했지만 이 사건은 청의 경각심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 같은 시기 러시아의 동향을 경계한 영국은 조선의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기도 한다. 이로써 청은 일본 외에 복수의 국가들의 동향을 함께 주시하게 된다.
 
갑신정변이 수습되는 1885년 전후부터 조선정세를 안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립화, 단독 보호, 공동 보호 등이 대두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느 하나 성립되지 못한다. 대신 '속국'으로도 '자주'로도 명쾌하게 가름할 수 없는 조선의 불가해한 정황이 불안정하면서도 파탄에 이르지 않는 미묘한 국제정세를 상징하게 된다.
 
독립 자주
 
조선에서는 동학운동이 격화되고 있었다. 동학이란 서학(기독교)에 대한 명칭으로, 유교를 근간으로 해 불교와 도교, 민간신앙까지 융합한 조선의 신흥 종교였다. 조선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되려 이 운동은 불이 붙어 외국 배척을 주장하고 당국의 해산 명령에도 따르지 않았다. 조선정부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의 군사적 원조를 구할 방안을 모색했다. 이에 청이 아산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반란은 청군의 태세가 갖춰지기도 전에 수습됐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일본이 긴밀히 움직였다. 청에 맞서 한반도 내 '세력균형화'를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이로 인해 끝내 청일전쟁에 불이 당겨졌다. 청일이 전쟁에 돌입하자 중간 영역을 형성하던 당사자이자 지켜만 보고 있던 열강의 입장도 변했다. 예컨대 영국의 경우 청일의 개전을 틈탄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해 정전을 알선했다.
 
일본은 청이 철수하지 않자 군대를 경복궁에 투입해 조선 정부 자체의 개조에 착수했다. 민씨 정권의 요인을 추방하고 신정부를 조직하면서 일본의 내정 개혁 요구에 따른 이른바 갑오개혁이 시작되게 된다. 그 시책의 대부분은 조선 측의 각 방면으로부터 저항을 받아 벽에 부딪히게 된다. 갑오개혁으로 실각해 불만을 가진 일파는 민비 아래 결집해 러시아 세력에 기대 실지 회복을 꾀하게 됐다. 일본의 시책은 하는 족족 러시아 당국의 견제를 받아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민비 암살, 이른바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위정척사파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벌어지고, 고종부자를 경복궁에서 빼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신정부를 수립하는 아관파천이 벌어진다. 청일 전쟁 이래 힘만 믿고 조선에 단독 진출한 일본에게 이것은 좌절이 되었다. 또한 조선의 입장에서 아관파천은 청의 존재, 혹은 '속국 자주'가 조선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시대의 종언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관파천 후 1년이 지난 1897년 2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새로 보수한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도 대한제국으로 고치면서 조선은 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중국의 화이관으로부터 열국 병존의 국제관으로 세계관을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한.청 통상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고, 마침내 조선은 청과 대등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의 '독립 자주'를 성립시킨 것은 국제적 요인의 미묘한 복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00년 러시아의 만주점령이 일어나면서 다시금 일본의 위기감이 고조된다. 러시아의 만주점령 이래 일본 정부 내에서는 '러일 협상론'과 '일영 동맹론'이 병존한다. 만약 이때 일본이 러시아와 제휴를 선택해 러시아가 당시 주장한 한국 중립화 정책을 택했다면 일본이 아무리 한국 진출을 확대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분적인 것에 그쳤을 것이라고 저자는 예상한다. 하지만 일본은 적극적인 한국 진출을 의미하는 영일동맹을 택했다. 동맹을 맺은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에 만주 군대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만주에 눌러앉아 남하를 재개하는 자세를 보였고,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이해조정은 최종적으로 결렬돼 마침내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는 동시에 한국의 명운을 결정짓는 사건이기도 했다. 
 
에필로그
 
한반도를 둘러싼 역학 관계를 어떻게 조정하고 안정시킬 것인가 하는 역사적 과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저자는 역사가 그대로 재생되지는 않더라도 과거의 여러 다양한 선택지와 가능성의 형태를 모색해보고, 미래에 취해야 할 태도를 결정하는 데 참고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책 속 밑줄 긋기
 
"어쨌든 그 핵심은 '속국'이나 '보호', '자주'나 '독립' 각각으로 일원화할 수 없는 중간 영역이 있고, 그것이 일종의 세력균형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시간은 흘러, 국가는 융성했다가 바뀌고, 군사력의 형태가 변화해도, 과제를 압박하는 원리 그 자체는 아무래도 바뀌지 않았다."
 
"한반도는 지금도 여전히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들은 거기에 서서, 극히 절실한 문제임을 자각하면서, 유효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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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2> 이삼성 지음 | 한길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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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볏 문화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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