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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북리뷰)창의력을 자극하는 잡지 '버수스'
이미지와 텍스트의 대비 통해 상상의 틈새를 벌리다
2012-08-27 14:22:21 2012-08-27 14:23:43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버수스는 메시지나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제작자와 독자 모두에게 창의적인 움직임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잡지 'versus' 소개글 중에서)"
 
전자책이 편의성을 무기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일부 종이책은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는 쪽을 택했다. 책 시장에서의 생존 고민을 초탈한 듯 되려 더욱 불편해보이는 인터페이스를 의도적으로 채택하는 책들도 더러 있다. 갤러리 팩토리에서 2008년부터 1년에 한 권씩 내는 비정기 간행물 '버수스'는 이런 '불편한 책'의 좋은 예다.
 
이 잡지는 웬만한 가방에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데다 유광코팅을 생략한 채 인쇄되어 때가 쉽게 묻는다. 불편한 것은 겉모양뿐만이 아니다. 책에 실린 이미지와 텍스트의 파편들을 보고 있노라면 처음에는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같은 총체적인 불편함이 바로 이 책의 전략이자 장점이다. 책을 접한 독자는 자연스레 혹은 어쩔수 없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해독자로 변신하게 된다.
 
 
잡지의 제목으로 쓰인 '버수스(versus, 약자로 vs)'라는 단어는 '…대(對),…에 대비(對比)하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스포츠 경기와 같이 대결구도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꼭 양자가 적대적 관계일 때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대조 혹은 비교를 통해 둘 간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건 두루 쓰이는 표현이 바로 '버수스'다. 잡지 '버수스'는 이처럼 두 대상 간의 차이나 틈새를 벌려 놓고 독자의 창의적 세포를 간지럽힌다.
 
지난 18일 발행된 '버수스' 5호는 '번역'을 테마로 하여, '원문'과 '번역문' 사이의 미묘한 '대비(versus)'를 포착해냈다.
 
필진으로 참여한 김희진, 박상미, 배수아, 송태욱, 엄지영, 유지원, 윤원화, 이원열, 최애리 등은 하나같이 학위나 자격증이 아닌 인문학적 내공과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인정받는 번역가들이다. 이들은 버수스 5호를 통해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일본어로 쓰인 대문호의 미문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빚어내며 아름다운 차이의 결을 만들어냈다.
 
번역가들은 자신이 직접 고른 작가들의 글 10편(단편소설 9편, 악극 1편)을 우리말로 옮겼고, 후기를 통해 내밀한 속이야기를 전했다. 국내에 반드시 번역되기를 바라는 책, 그리고 부디 번역되지 않기를 바라는 책들의 목록과 그 이유가 적혀 있는 점도 흥미롭다. '세계문학전집 출간'으로 대변되는 출판사의 각종 기획상품 속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찾으려는 번역자들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읽힌다.
 
번역된 글 중에서는 아무래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글이 가장 눈에 띈다. 번역가 엄지영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문학적 스승이자 아르헨티나의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 그러나 아직은 세계문학계에서 미발굴 작가로 남아 있는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를 소개했다.
 
번역된 작품은 타인의 의식을 이식받은 이가 자신이 치르지도 않은 죄값을 받는다는 이야기 <의식절제수술>, 주변 식물의 양분을 다 빼앗아 먹다 급기야 이 세상 모든 것을 삼키게 된 호박 이야기 <우주가 된 호박> 등 두 편이다. 대작가의 무한한 상상력과 깊이있는 사고력은 엄지영의 섬세한 번역에 힘입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밖에 소설가 배수아가 번역한 이란 작가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역시 국내에서는 당분간 만나보기 힘들, 귀한 글이다. 
 
특히 소설가 겸 번역가인 배수아는 모국의 평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이란 작가의 작품을 독일어 번역본으로 접하고 그에게 공감하게 되었다는 인상적인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또 샤를 보들레르가 번역한 에드가 앨런 포의 <베레니스>를 김희진이 다시 번역한 것도 눈에 띈다. 김희진은 포가 처음에 썼다가 삭제하는 바람에 보들레르의 번역본에만 남아 있게 된 대목을 그대로 살려 옮김으로써 원작자 및 선배 번역가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내비쳤다. 
 
이처럼 버수스 5호는 '차이'에 주목하고 그 '틈새'를 벌려놓음으로써 '차이의 죽음'을 지연시킨다. 책 표지와 내지 곳곳에 들어간 아티스트 듀오 '최승훈+박선민'의 사진과 드로잉도 예사롭지 않다.
 
'결정(結晶, crystal)' 대 '결정(決定, decision)'이라는 테마로 소개된 이들의 작품은 잡지에 소개된 글과는 별도인 독립적인 작품으로 비치는 동시에 버수스의 콘셉트를 간접적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격 1만5000원, 판매처 갤러리팩토리, 더북소사이어티, 가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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