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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의 한국철학사 35화)서경덕: 하늘의 기밀을 탐구하다

조식·성운과 함께 '조선의 삼대 처사'…벼슬길 단념·수도만 정진

2023-12-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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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행적으로 삶을 가득채운 매월당 김시습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선비 가운데서 철학자라는 이미지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1546)입니다. 그의 자(字)는 가구(可久)이고, 호는 복재(復齋), 화담(花潭) 등입니다. 개성의 성거산 기슭에 있는 화담이라는 연못가에 초막을 짓고 수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해서 사람들이 그를 ‘화담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서경덕은 송도 화정리에서 가난한 시골 선비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밭일을 했습니다. 숙종 때 탕평 상소를 올린 박세채(朴世采)의 <어릴 때 들은 것들을 기록함(記少時所聞)>이란 글에는 그의 일화가 나옵니다.
 
글은 이런 내용입니다. 그가 7살 때, 바구니를 들고 나물을 캐러 갔다가 귀가가 늦었는데 바구니도 텅 비어있었습니다. 어른들이 왜 그랬는지 묻자 그의 답은 “새가 나는 이치를 알아내려고 생각하느라 나물을 캐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철학자적 일화가 <연보>에 더 나옵니다. 서경덕이 14살 때 그가 《상서(尙書)》를 배운 선생이 송도에 있었습니다. 《상서》<요전(堯典)>편의 “기삼백(朞三百)”이라는 구절에 이르자, 이 선생은 “이 구절은 이해하는 이가 드물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서경덕은 보름 동안 생각해 뜻을 스스로 깨우쳤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사유하면 뜻을 깨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체험이 그로 하여금 사색의 철학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가 18살 때는, 《대학(大學)》을 읽다가, “앎에 이르는 것은 사물을 탐구함에 있다[致知在格物]”는 구절에 이르자, 말하기를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천지만물의 이름을 하나씩 써서 벽에 붙여놓고 매일 그 사물의 이치를 모두 깨달을 때까지 탐구했습니다.
 
조선의 대표적 기철학자 화담 서경덕의 문집 《화담집》.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서경덕은 스스로 탐구하고 사색하여 자기 사유를 정립한 철학자입니다. 유학에서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론은 《대학》에 나오는 “앎에 이르는 것은 사물을 탐구하는 데 있다[致知在格物]”고 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거의 유일합니다. 서경덕은 아마도 2000년 유학의 역사에서 ‘격물치지’의 방법을 가장 잘 발휘한 철학자입니다. 격물치지 때문에 가장 크게 낭패 본 사람은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 왕수인입니다. 그는 젊었을 때, 대나무의 이치를 격물궁리하려다가 7일 만에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서경덕은 어릴 때부터 봄날의 종달새가 매일 조금씩 더 높이 날아오르는 이치를 알아내려고 궁리했고, 14살 때 《상서(尙書)》의 “기삼백(朞三百)”이란 난해한 구절을 궁리를 통해 뜻을 파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격물궁리의 방법으로 우주의 이치, 옛성현들이 깨우치지 못한 이치를 다 깨우치려 했습니다. 그가 격물궁리로 깨우친 내용을 담은 시가 있는데, 바로 <하늘의 기밀[천기(天機)]>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보면 서경덕이 벽에 하도(河圖)를 붙여놓고 3년 동안 격물궁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서경덕은 “하늘의 기밀을 통찰했노라[洞然見天機]”고 선언합니다. 그가 통찰한 ‘하늘의 기밀’이란, 음양의 감응으로 삼라만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경덕 철학의 주요 내용이기도 합니다. 서경덕이 스스로 궁리하여 고전의 난해한 대목을 깨친 일은 매우 유명하여서, 그의 비판자인 이퇴계도 깜짝 놀랐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연보>에 따르면, 서경덕은 21살 때 작은 초막에 홀로 앉아 잠과 식사도 거르며 사색을 계속했습니다. 3년을 거듭하자 병을 얻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움직이기 불편하니 더욱 사유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서경덕이 56살 때 와병한 지 오래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풀이가 있는 것은 군더더기가 필요 없고, 아직 해명 못한 문제들에 대한 글을 짓고 싶었습니다. 이제 병이 중해졌으니, 나의 말을 후학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원리기(原理氣)>, <이기(理氣)>,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의 글을 썼습니다.” 이 네 편은 서경덕의 철학의 핵심이 담긴 주요 저술들입니다.
 
조선 후기의 서화가 강세황이 개성을 방문한 1757년 그린 《송도기행첩》에 실려 있는 서경덕이 거주했던 송도(개성) 화담의 풍경. 사진=필자 제공
 
서경덕이 31살 때 조정에서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개혁 정치로, 초야에 묻힌 현재들을 추천해 벼슬에 나아오도록 하기 위한 천거과(薦擧科)가 시행돼 120명을 추천해서, 서경덕이 1순위였으나 사양했습니다. 서경덕은 어머니의 성화로 과거시험을 치러 합격했지만, 벼슬은 받지 않았으며, 나중에 조정에서 ‘후릉참봉(後陵參奉)’이라는 한직을 내렸지만, 사양했습니다. 당시 공부를 출세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진리 탐구의 수단으로 삼는 이들을 ‘처사(處士)’라고 불렀습니다. 서경덕은 조식(1501~1572), 성운(1497~1579) 등과 함께 조선의 삼대 처사로 이름났습니다. 조식과 서경덕은 아예 벼슬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실천했습니다. 잦은 사화(士禍)로 사림은, 벼슬길에 올라 개혁을 실천하는 일에 위축이 되었으나, 스스로 벼슬길을 아예 단념하고 용맹정진하는 선비의 존재는 사림을 일깨우는 보루였습니다. 맹자(孟子)는 “임금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신하”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맹자는 말합니다.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신하로 삼겠습니까?”[《孟子》, <盡心ㆍ上>, 13-8] 이들이 선택한 삶의 길은 맹자가 이상시한 “만나보기도 쉽지 않고 신하로 삼기도 어려운 선비”라는 논의와 가장 걸맞은 삶이였습니다.
 
서경덕은 임금조차 함부로 신하로 삼기 어려운 선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우주의 근원을 <무현금명>’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모습이 없는 데서 즐겨야 그 구하는 바를 얻을 것이며, 소리가 없는 데에서 들어야 그 묘함을 얻을 것입니다. 밖에서는 있음에서 얻고 안에서는 없음과 합해집니다. 그 가운데에서 즐길 수 있음을 돌아볼 것이니 어찌 줄 위의 공부를 일삼겠습니까?(《花潭集》 <無絃琴銘>)” 서경덕은 우리 눈앞의 현상계를 넘어선 ‘앞선 하늘[先天]’에 대해서는 송명리학을 만든 인물들인 주렴계, 장재, 소옹 등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자신감 넘치게 말합니다. 이미 앞선 성현들이 한 말에 대해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한 그가 심혈을 기울여 해명한 부분은 바로 현상계를 넘어선 ‘기운[氣]’의 세계입니다. 서경덕은 이렇게 주렴계, 장재, 소옹의 학설에서 미진한 점에 대해 병석에서 쓴 글에서 명쾌하게 밝혔습니다. 현상계가 변화하기 이전의 우주를 ‘앞선 하늘[先天]’이라고 하여 설명한 것과, 기운이 하나에서 둘로 나뉘어져 열림과 닫힘, 생성과 소멸의 운동을 한다는 것, 이치는 기운의 주재로서 기운 바깥에 별개로 존재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 그것입니다. 특히 이치가 기운에 앞설 수 없고 기운의 바깥에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이치가 기운에 앞선다”고 주장한 주희의 설과 맞서는 것이어서, 그가 주희 성리학을 맹종한 것이 전혀 아님을 보여줍니다. 서경덕은 유기론 철학자로 불리지만, 그의 글을 보면 도가 사상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고, 장자의 소요(逍遙) 등을 생활철학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경덕은 유가와 도가 사상을 융합하여 기철학을 정립했습니다. 그는 문학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주가 신묘한 것을 낼 때는 외진 땅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 내놓습니다.[惟后毓靈而效珍, 必奇之異地。(앞 책, <桃竹杖賦>)]” 이 말은 아마도 그를 위한 잠언으로 읽힙니다.
 
서경덕이 어릴 때부터 사물의 관찰을 좋아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 <어릴 때 들은 것들을 기록함[기소시소문(記少時所聞)]>이란 글을 남긴 조선 중후기의 문인 박세채(朴世采)의 초상. 사진=필자 제공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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