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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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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쉬움' 난이도에 과욕 부린 게임사들

2023-12-12 18:15

조회수 :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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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하다가 '설정'을 켜는 이유는 많지 않습니다. 진행 내용을 저장하거나 불러오거나 각종 편의 기능을 살피기 위해서죠. 그런데 요즘 제가 하는 게임마다 설정 버튼을 찾는 이유가 늘었습니다. 진짜 이 난이도가 '쉬움'이 맞는지, '보통'을 잘못 눌러놓은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쉽다’를 찾으면 ‘하기가 까다롭거나 힘들지 않다’는 뜻이 나온다. 물론 반대말은 '어렵다'다. (사진=국립국어원 웹사이트)
 
얼마전에는 원더포션이 만들고 네오위즈가 배급하는 '산나비' 난이도를 기사에서 비판했는데요. 최근 다시 시작해 결말에 가까워진 게임 '저지 아이즈: 사신의 유언'마저 제 손목을 잡고 있습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훌륭한 연출과 시나리오로 칭찬 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쉬움'을 선택해도 결말을 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산나비의 쉬움 난이도는 주인공 체력을 무적으로 만들지만, 발판을 딛고 살아남아야 하는 플랫포머 장르 특성상 구간 돌파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마고 공장 보스 '관리자' 눈을 피해 달아나야 하는 구간을 여럿 뚫어야 하는데요. 세 구간마다 자동 저장 되다 보니, 운 좋게 두 구간을 돌파해도 실패하면 또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게임 진행이 이런 식이니, 몰입감이 한창 높아지는 후반부에서 감정선이 자꾸만 끊어집니다. 쉬움 난이도에선 자동저장 횟수를 늘려주든지, 돌파 난이도도 낮춰주든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숙련과 재도전으로 기쁨을 얻고 싶었으면 제가 '보통' 난이도를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저지 아이즈: 사신의 유언’에서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탐정을 하고 있는 야가미 타가유키(기무라 타쿠야). 배우 얼굴을 스캔하고 대사를 녹음해 만들었다. (사진=저지 아이즈 실행 화면)
 
저는 비슷한 문제를 '저지 아이즈'에서도 겪고 있습니다. 이 게임은 일본 세가(SEGA)의 류가 고토쿠(용과 같이) 스튜디오에서 2018년 내놓은 리걸 서스펜스 액션 게임입니다. '용과 같이' 시리즈로 유명한 나고시 토시히로가 감독을 맡았고, 후루타 츠요시가 각본을 썼습니다. 처음엔 플레이스테이션(PS)4용으로 나왔고 2021년에는 PS5에서 할 수 있는 리마스터판이 나왔습니다. 같은 해엔 후속작 '로스트 저지먼트: 심판받지 않은 기억'이 출시됐습니다.
 
저지 아이즈는 배우 기무라 타쿠야가 주연을 맡았고, 나카오 아키라, 타키토 켄이치, 타니하라 쇼스케 등 익숙한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각 배우의 얼굴을 스캔하고, 모든 대사를 녹음하는 식으로요. 액션 장면은 전문 배우가 연기했습니다.
 
야가미에게 돈 받고 정보를 넘기는 부패 형사 아야베 카즈야(타키토 켄이치). (사진=저지 아이즈 실행 화면)
 
이 게임은 변호사 '야가미 타카유키(기무라 타쿠야)'가 힘 있는 자들이 멋대로 규정한 '정의'와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야가미는 3년 전 자신의 변호로 무죄 선고 받은 살인사건 피고인이, 석방 뒤 살인을 저질러 사형 선고를 받은 데 충격 받고 탐정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하는데요. 야쿠자들의 세력 다툼으로 보였던 연쇄 살인사건이 사실은 신약 개발을 둘러싼 이권 다툼의 결과였고, 3년 전의 사건도 연관돼 있음을 밝혀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저지 아이즈는 13부작짜리 드라마라고 보시면 됩니다. 각 장에 들어설 때마다 지난 줄거리를 보여주고 연출 방식도 드라마와 똑같습니다. 저는 오늘(12일) 새벽 2시를 넘겨 마지막장에 들어갔는데요. 제작진이 정말 '쉬움' 난이도를 사전에 쓰인대로 '하기가 까다롭거나 힘들지 않게' 만들었다면, 이틀 전에 결말을 봤을 겁니다.
 
왜냐고요? 이야기 전개 사이사이에 쓸데없는 경험을 지겹도록 해야 하니까요. 주인공 아야미가 몇 발자국만 걸어도 온 동네 야쿠자가 떼로 달려듭니다. 멀리 도망치는 데 성공하거나 일일이 맞서 싸워야 하죠.
 
처음엔 싸움 연출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나치게 반복되는 야쿠자와의 싸움에 질리게 된다. 굳이 쉬움 난이도에서도 잦은 싸움을 유도해야 했을까. (사진=저지 아이즈 실행 화면)
 
도망 가기 귀찮을 땐 자포자기하고 싸웁니다. 입간판이나 자전거 휘둘러 팰 때의 진동과 화면 연출은 좋지만, 이것도 한두번이어야 말이죠. 쉬움 난이도를 선택한 사람도 이걸 수십 수백 번을 봐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물론 제작진 의도는 알겠어요. 이 게임은 주인공이 주된 이야기 외에도 동네 주민이나 상인들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는 사건을 해결하며 평판을 올리고, 여성 캐릭터와의 데이트도 하고, 드론 대회나 오락기 사용, 카지노도 이용하게 유도합니다. 도쿄의 유흥가 카부키쵸를 본떠 만든 '카무로쵸'에 사는 것처럼 느끼게 하려는 의도죠. 그리고 동네 깡패들을 혼내줘 경험치를 쌓으면 체력과 싸움 실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일본 영화와 드라마로 익숙한 유명 배우들이 게임 안에서 질문과 답을 주고 받으며 사건의 조각을 맞춰간다. 무엇을 어떤 순서로 물어볼지는 게이머 선택에 달렸다. (사진=저지 아이즈 실행 화면)
 
그런데 이런 거리 싸움은 제작진 스스로 난이도 설명에 적었듯이 '스토리 위주'로 즐기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닙니다. 깡패들과 조우하는 횟수를 보통 난이도의 10%쯤으로 줄여주고, 경험치는 많이 얻게 했어야 합니다.
 
저는 이놈의 야쿠자들한데 얻어터지느라 '스토리 위주'로 즐기기가 너무나, 너무나 힘들고 짜증이 났습니다. 어제 극 후반부에 돌입했더니, 총 쏘는 놈이 나와서 도망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12일 오전 2시 반. 저는 의혹의 퍼즐을 맞추고 거악에 맞설 법정 싸움을 준비하다 잠들었습니다.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든 연출과 시나리오 때문에요. 이야기에 대한 평가는 결말을 보고 나서 하겠습니다.
 
게이머들은 용과 같이 스튜디오에 찬사를 늘어놓습니다. 2021년 출시된 후속작 다음으로 3편이 나올지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네요.
 
하지만 저에게 이 작품은 쉬운 난이도를 선택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형편없는 게임입니다. 이런 난이도에선 각종 부가 요소와 높은 숙련도 요구, 특히 지겹도록 반복되는 전투 등 자신들의 욕심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썸니악의 '마블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보세요. 아예 '네이버후드 프랜들리' 모드를 만들어서 게임성은 알게 하되, 반복된 좌절로 극의 흐름을 깨지 않게 배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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