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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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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뉴게임+)딸 바보 아빠의 아름다운 이별 여행 '산나비'

딸 복수 위해 산나비 찾는 여정

2023-11-29 06:00

조회수 : 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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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산 속 오두막집에 사는 퇴역 준장과 여덟 살 딸이 오늘도 들판에서 모험 놀이를 합니다. 딸에겐 아빠가, 아빠에겐 딸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무전기 놀이를 하던 딸이 집에서 '시간이 거꾸로 가는 시계'를 찾아냈고, 그 순간 아빠는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폭탄 테러로 딸이 죽고 만 것인데요. 테러범 이름은 산나비. 준장은 그가 있는 마고 시를 향해 오른팔에 달린 쇠사슬을 뻗으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그런데 기억 속의 딸은 자꾸만 이렇게 외칩니다.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원더포션이 개발하고 네오위즈(095660)가 지난 9일 출시한 산나비가 연일 게이머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원더포션은 아빠와 딸의 아름다운 이별 여행을 2차원 화면의 도트(점) 강조 그래픽으로 촘촘하게 찍어냈습니다.
 
힘든 내색 하지 않고 자신과 놀아주는 아빠에게 딸이 안겨 고마워한다. (사진=산나비 실행 화면)
 
슬프게 지켜낸 딸과의 약속
 
서사를 살펴보기 전에, 작품의 특징을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제작사 원더포션은 이 게임 장르를 '조선 사이버펑크 사슬 액션 플랫포머'라고 부릅니다. 조선은 가상의 미래 조선을 뜻하고요. 사이버펑크는 어둡고 기계중심인 배경을 바탕에 둔 장르를 말합니다. 주인공이 기계 팔에 달린 사슬을 천장과 벽, 적에게 쏘면서 앞으로 나아가니 사슬 액션이고요. 마지막으로 플랫포머는 발판 등 받침대(플랫폼)을 타고 뛰고 구르는 식으로 진행한다는 뜻입니다.
 
세계관은 어둡습니다. 딸 잃은 퇴역 준장이 산나비를 쫓아 향한 마고 시는 조선 최고 대기업 마고 그룹이 소유·운영하는 도시입니다. 그림 속 인물에 기계 몸을 덧칠한 고전 명화, 향락과 기억 조작을 권하는 각종 네온사인으로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를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딸의 복수를 위해 자신이 전역했던 부대로 돌아가, 옛 부하들 도움으로 마고 시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나기로 한 해커가 10대 소녀입니다. 소녀의 이름은 금마리. 자신을 해커가 아닌 '정보 자산 취득 전문가'로 불러달라 하는데요. 금마리의 발랄한 행동은 어째서인지 기억 속 딸과 비슷해 보입니다.
 
여기까지만 봐도 생각나는 영화가 한둘이 아닐 겁니다. 산나비도 다른 게임과 영화처럼 주류의 문법을 따릅니다. 도입부에 사용된 특정 장면이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반복해 재생되고, 결말에서 그 도입부를 다시 환기합니다. 이 게임에선 기억 속 딸의 대사인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가 바로 그런 장면에 해당합니다.
 
주인공이 마고시에 들어설 때 카메라가 멀어지며 세계관을 한 눈에 보여준다. (사진=산나비 실행 화면)
 
주류의 문법을 따른다는 건, 주요 인물 관계와 이야기 흐름을 중반부터 예상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같은 장르 작품이 개별 창작물로 인정받는 이유는 고유의 플롯이 지닌 힘 때문입니다. 원더포션은 주인공이 자기 정체를 깨닫는 순서, 자신의 무의식을 지배하던 산나비의 실체를 알아채는 순서를 눈물샘이 자극될 만큼 감동적으로 설득력 있게 배열했습니다.
 
플롯의 긴장감을 만드는 데는 지식의 단계적 노출이 한 몫 합니다.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땐 준장과 게이머가 가진 지식이 동등한 상태인데, 이 단계에선 산나비는 미스터리로 가득한 존재입니다. 이후 금마리가 사건의 원인과 주인공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 게이머를 놀라게 하는데요. 게이머가 준장의 무의식을 탐험하며 산나비에 대한 진실을 알아가면서, 미스터리가 하나씩 풀리는 구조입니다. 영화와 달리 결말을 게이머가 선택해야 하는 분기점을 제시함으로써 게임 고유의 긴장감을 높이기도 합니다.
 
마고물산 대표이사의 초상화. 사이보그처럼 보인다. (사진=산나비 실행 화면)
 
화면 효과도 2D 그래픽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우선 게이머가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할 때는 '익스트림 롱 숏'을 활용, 거대하고 뚫기 어려워 보이는 마고 시와 마고 그룹을 올려다보게 합니다. 또 앞으로 헤쳐 가야 할 활동 공간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롱 숏이 각 장의 주요 장치로 활용됩니다.
 
도트가 강조된 게임 특성상 표정을 자세히 보여주는 클로즈업이 적은 대신, 기억 속 방방 뛰는 딸의 모습과 금마리의 과장된 행동, 두 소녀의 눈 주위가 반짝이는 효과 등으로 인물의 성격과 딸에 대한 그리움을 부각합니다.
 
그럼 산나비의 기본 플롯, 그리고 지식의 단계적 노출에 맞춰 이야기를 좀 더 훑어볼까요. 준장 일행은 인구 300만명에 달하는 이 도시에 이상하게도 사람의 흔적이 없고, 도시가 자체 소멸 준비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뜬금없이 금마리는 자꾸만 준장 아저씨한테 하모니카를 불어달라고 하네요. 혼자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길도 굳이 아저씨와 함께 돌파하려 합니다.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딸은 끝까지 가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진=산나비 실행 화면)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넘긴 준장이 마고 본사에서 마주한 진실은 가혹합니다. 아빠를 기쁘게 해 주려던 천재 딸의 순수한 마음이 사건의 발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충격적인 내막을 알게 된 준장은 10년 전 딸과의 대화를 기억하게 되고, 거기서 산나비의 정체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딸과의 약속을 지키는 이별 여행을 해왔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기억 속 딸이 외친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의 뜻을 풀어내는데요. 결국 끝이 오고야 마는 부모 자식의 슬픈 인연에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는 대사가 더해지며 게이머들의 목을 메이게 만듭니다.
 
기억 속 딸은 그간 힘든 내색 하지 않고 놀아준 아빠에게 고마워하며 마침내 안기는데요. 마치 아빠의 고단한 여정을 위로하는 듯합니다. 딸과 아빠의 마지막 경례가 나오는 이별 장면에 이르면, 강철로 된 심장을 지니지 않은 이상 참았던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산나비 연출의 농도는 대작 3D 게임 못지 않게 짙습니다. 특히나 이야기가 결말로 치닫는 과정에서 더욱 그러한데요.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면 지금껏 카메라가 비춰온 주인공의 모습에서 모종의 변화가 감지됩니다. 이같은 변화 속에서도 '아빠'라는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아 감동은 더욱 커지고요, 또 이제껏 이야기를 함께 이끌어온 게이머들로 하여금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자문하게끔 하는 효과까지 낳습니다.
 
이처럼 산나비는 첨단 도시와 공장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와 딸이 뛰놀던 들판의 산들바람의 정취를 연신 느끼게끔 하는 게임입니다. 그 봄바람 속엔 엄마의 노래와 딸의 위로, 지울 수 없는 아빠의 사랑이 오롯이 겹쳐져 있죠.
 
마고 공장의 관리자가 주인공을 주시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화면이 점점 흐려진다. 제한 시간에 길을 뚫어야 하는데, 쉬운 난이도를 선택해도 비숙련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진=산나비 실행 화면)
 
'쉬움' 난이도는 정말 쉬워야
 
그러나 산나비엔 벅찬 감동을 방해하는 단점도 있습니다. 산나비를 플레이할 때 처음 주어지는 난이도는 '쉬움'과 '보통', '베테랑'인데요. '쉬움'을 선택한 사람마저 길 통과를 어렵게 설계해 놓은 건 해결해야 할 문제점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마고 공장을 지키는 로봇 '관리자'의 눈을 피해 제한 시간 내 돌파해야 하는 구간이 여럿 있는데요. 여기선 난이도와 관계 없이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려운 구간 세 개를 한 번에 통과해야 자동 저장하는 식인데, 쉬움 난이도에서는 구간별 자동 저장을 제공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단점은 결말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와 사연을 알아내기 위해 기억 속에 펼쳐진 길을 돌파해야 하는데, 이마저 숙련도가 낮으면 몇 시간을 허비해야 해서, 직전까지 키워온 감정선이 끊어지게 됩니다.
 
반복된 도전으로 실력을 키우고 그에 따른 성취감을 얻게 하는 건 좋지만, 이는 보통 이상 난이도를 선택한 사람들의 몫으로 둬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적당히 게임성을 맛보며 서사 중심으로 즐기려고 '쉬움'을 선택한 사람조차 비숙련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하는 점에 대해선 원더포션이 진지하게 고민을 더 해봤으면 합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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