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권익도

(한국철학사 기획 연재 34회)사육신 사건이 남긴 것

절차적 정당성 위한 조선 선비들의 저항과 항거

2023-12-04 06:00

조회수 : 1,222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단종 복위를 추진한 ‘사육신 사건’은 조선조의 왕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던진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권력자가 폭력을 이용해 권력 장악에 성공했더라도, 절차에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으면 언제라도 조선 선비들의 목숨을 건 집단적 저항과 항거에 부딪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육신 사건은 조선의 사림 집단이 어떤 이념적 지향과 실천을 해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 같은 사건이 되었습니다.
 
김시습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고, 김시습과 친구이면서, 함께 ‘생육신(生六臣)’이라고 불리는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육신전(六臣傳)>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당시의 최고 금기에 속하는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글로 남긴 것입니다. 그가 처음 이 저작을 쓰고자 할 때, 그의 주변 벗들과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그는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吾豈畏一死。終沒忠臣之名乎。]며, 이 글을 세상에 펴냈습니다. <육신전(六臣傳)>에서 말하는 ‘육신’이란, 단종 복위를 추진한 성삼문 등‘사육신(死六臣)’을 말합니다. <육신전>은 계속 조선조 왕실이 금기시하는 금서(禁書)였지만, 조선의 사림파 선비들은 이 글을 기꺼이 자기 손으로 필사본으로 베껴써서 계속 서로 돌려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숙종 때에 와서 비로소 공식적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노량진에 조성된 ‘사육신 역사 공원’의 정문인 ‘불이문(不二門)’. 사진=필자 제공
 
<육신전>에는 사육신들이 김질과 정창손의 밀고로 단종복위운동 추진 사실이 드러난 뒤 세조에게 잔혹한 고문을 수반한 국문(鞠問, 취조)을 당할 때 이들의 태도와 발언 내용이 상세하게 담겨있습니다.
 
성삼문은 세조가 고문과 국문을 할 때 세조를 계속 '나으리'[進賜, 이두 표기]라고 호칭했다. 《세조실록》과 <육신전> 에서 사육신들은 세로의 물음에 대해서 묵비권을 행하거나 대답을 거부하지 않고 술술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상세하게 다 대답했음을 알 수 있다.
 
사육신들은 세조의 무력에 의지한 권력 찬탈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단종을 복위시키는 일은 신하로서 해야 할 너무나도 명명백백하게 떳떳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숨기거나 침묵할 내용이 한 점도 없다고 여겼음이 잘 드러납니다.
 
처음 읽을 때는 사육신들이 세조의 국문에 대해서 왜 이렇게 술술 자기 자신들이 하려고 했던 단종 복위 추진에 대해서 다 순순하게 얘기하는지를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이들은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단종을 복위시키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속 마음을 숨길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생육신 여섯 명의 캐리커춰. 사진=필자 제공
 
처음에 성삼문이 세조 앞에 잡혀왔을 때, 그는 자신들을 밀고한 “김질과 대질하기를 원한다.” 하였습니다. 세조가 김질을 불러내어 그가 밀고한 내용을 말하도록 하니, 성삼문은 김질의 설명 내용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며, 그의 발언을 막으며 자신이 직접 설명했습니다. 성삼문은 말하기를, “다 참말이다. 상왕(단종)께서 춘추가 한창 젊으신데 손위(遜位, 임금자리를 수영대군에게 양보한 일을 가리킴)하셨으니, 다시 세우려 함은 신하된 자가 마땅히 할 일이라, 다시 무엇을 묻는가.” 하고 김질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고한 것이 오히려 말을 둘러대어 직절하지가 못하다. 우리들의 뜻은 바로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세조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하니, 성삼문은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온 나랏사람들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뺏으니, 성삼문이 신하가 되어서 차마 군부(君父)의 폐출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남효온이 저술한 <육신전>은 한자로 기록했음에도, ‘나으리’라는 우리나라 고유 토박이말을 이두로 ‘진사(進賜)’라고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기를 보면, 남효온이 왕실에서 사관(史官)으로 일하고 있는 자들과 친분이 있었거나, 세조의 사육신 국문 현장에 참석할 수 있었던 사관들과 교류가 있어서 이런 현잘 상황을 사실간 넘치게 재현해서 교회 남길 수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조가 말하되, “네가 ‘신하[臣]’이라 일컫지 않고 나를 ‘나으리[進賜]’라고 하는데, 네가 내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역이다. 겉으로는 상왕을 복위시킨다 하지마는, 실상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내가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일 믿지 못하거든 나의 집을 적몰(籍沒)하여 따져 보라. 나으리의 말은 모두 허망하여 취할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성삼문이 죽은 뒤에 그 집을 적몰하니, 을해년(1455, 수양대군이 왕좌를 찬탈한 해) 이후의 녹봉을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아무 달의 녹”이라 적어 놓았다.
 
추강 남효온이 쓴 사육신 6명이 전기인 <육신전(六臣傳)>. 사진=필자 제공
 
세조가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하므로, 가만히 사람을 시켜서 전하기를,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박팽년이 웃고 대답하지 않으며, 임금을 일컬을 때에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조가 크게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그 입을 마구 때리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 하였습니다. 박팽년이 말하기를, “내가 상왕(단종)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狀啓, 조선시대에 지방관들이 왕에게 보내는 보고서)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臣)’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였습니다. 그가 보냈던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글자 모양이 비슷한 ‘거(巨)’자로 썼거나, 벼슬이름과 자신이름을 번거로워도 다 적었습니다.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한 창고에 봉하여 두었습니다. 세조가 유응부에게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려 하였느냐.” 하니, 유응부가 말하기를, “잔칫날을 당하여 한 칼로 족하(足下)를 폐하고 본 임금을 복위하려 하였더니, 불행히도 간인이 고발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하랴. 족하는 빨리 나를 죽이라.” 하였습니다. 세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상왕의 이름을 내걸고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구나” 하고, 무사로 하여금 살가죽을 벗기며 물으니, 유응부가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되 서생(書生)과는 같이 일을 꾀할 수 없다 하더니 과연 그렇도다. 지난번 잔치를 하던 날에 내가 칼을 시험하려 하니, 너희들이 굳이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 하여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사람이라도 꾀가 없으니 짐승과 무엇이 다르랴.” 하며, “만약 실정 밖의 일을 물으려거든 저 어리석은 선비에게 물으라.” 하고, 즉시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세조가 더욱 노하여 쇠를 달구어 배 아래 두 허벅지 사이에 넣으니, 지글지글 끓으며 피부와 살이 다 익었습니다. 유응부가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땅에 던지며,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 끝끝내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남효온의 <육신전>에 가록으로 남은 내용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육신전>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손으로 직접 베껴서 돌려보던 금서 중에 금서였습니다. 조선 중기로 가면서 사림 선비들은 이 <육신전>을 공식 간행해야 한다는 상소를 왕에게 지속적으로 올렸습니다. 그러자 이 <육신전>을 선조가 직접 읽어보고 깜짝 놀랐다는 대목이 《선조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선조실록》에 남은 선조의 빈응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른바 <육신전>을 보니 매우 놀랍다. 내가 처음에는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아랫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려니 여겼었는데, 직접 그 글을 보니 춥지 않은 데도 떨린다.” [《선조실록》선조 9년 병자(서기 1576년) 6월 24일의 기사] 선조가 <육신전>을 읽어본 뒤에 “춥지 않은 데도 떨린다(不寒而栗)”라고 소감을 말할 정도이다. 선조에게 뭐가 그렇게 떨리더냐고 물어보고 싶은 대목이지만, 그가 <육신전> 읽고 나서 떨은 이유는 한 가지 일 것입니다. 왕이 권력 장악에 성공했더라도, 절차에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으면 언제라도 자신의 신하여야 하는 조선 선비들의 목숨을 건 집단적 저항과 항거에 부딪칠 수 있음을 사육신 사건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 가장 지질한 임금 중에 한 명인 선조조차 <육신전>을 읽고, 왕권이 신하들에게  좌우될 수 있음을 감각적으로 느낀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사육신 사건은 조선시대에 임금과 신하,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사이의 힘의 균형을 새롭게 재조명하고 재조정하는 계기로 등장한 것입니다.
 
생육신의 한명으로 꼽히면서 사육신 6명이 전기인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사육신 사건’을 조선조 사림의 선비들에게 널리 알린 역할을 한 추강 남효온의 문집 《추강집(秋江集)》. 사진=필자 제공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 권익도

  • 뉴스카페
  •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