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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

33년 한국 문화계 터전 ‘학전’이 사라진다

2023-11-10 16:30

조회수 :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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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배울 학()에 밭 전(), 문화 예술계의 '못자리'라는 이 비유적 공간에서 모처럼 쑥쑥 자라난 무수한 예술계 인재들. 글자 그대로 지난 33년 간 한국 대중문화계의 산실 역할을 해온 '학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대중분들에게 '김민기=아침이슬'이라면 저희에게 '학전=김민기'입니다. 공연 연출가이자 작가로서 그분을 더 존경해왔기 때문에 그 분의 최종 결정을 따르는 게 맞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전의 김성민 팀장은 10일 뉴스토마토와의 통화에서 이 같이 말하며 "지속적인 운영난과 김민기 대표님의 건강 문제로 학전 창립 33주년을 맞는 내년 315일까지만 운영하고 문을 닫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에 따르면 김민기(72) 학전 대표는 얼마 전 위암 판정을 받고 1차 항암 치료를 마쳤습니다. 현재 건강 문제로 외부 활동은 하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운영난을 견뎌오던 중 건강 문제까지 겹쳐 학전 극장 폐관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김광석 흉상이 설치돼 있는 학전블루 소극장 앞마당. 사진=학전
 
김성민 팀장님은 1990년대 초 학전 개관 초기 대학생 시절 매표 아르바이트로 학전과 연을 맺고, 이후 김민기 대표-관객 사이에서 학전의 업무를 오랜 기간 담당해왔습니다. 소극장 공간 뿐아니라 한국 문화계의 터전으로 자리잡아왔던 학전에 대해 김 팀장은 "그런 상징성을 목표로 해왔던 단체는 아니고, 오히려 하루하루 묵묵히 공연을 해온 사람들에 의해 그런 상징적인 의미가 이후 부여되지 않았나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부터 올리는 '지하철 1호선' 공연을 시작으로 내년 폐관 직전까지 순서들을 차근차근 모두 올리는 것이 현재의 목표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1991 3 15일 대학로에 개관한 학전은 소극장 문화 공연의 터전이자, 한국 대중문화계의 상징 같은 곳입니다. 민중가요 '아침이슬', '상록수' 등을 작곡한 가수 김민기가 문을 열고 가요, 연극, 뮤지컬 등의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무대에 올려왔습니다.
 
1세대 아이돌 그룹이 가요계를 휩쓸던 1990년대 통기타를 든 가수들은 이곳에 몰려들었습니다. 학전은 이들을 무대에 세우며 라이브 기획 콘서트의 문화 토양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들국화, 유재하, 김수철, 강산에, 동물원, 유리상자, 여행스케치, 강산에, 장필순, 박학기, 권진원 등이 이곳에서 관객들과 만났습니다. 지난 2021 SBS에서 방영된 '전설의 무대-아카이브K'에서도 학전은 재조명된 바 있습니다. 학전 이후 라이브 콘서트 전문 공연장이 생겨났고, 그 흐름이 홍대 인디 밴드까지 퍼진 흐름을 살폈습니다.
 
학전 김민기 대표. 사진=학전
 
 김광석은 학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김광석은 199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 곳에서 총 1000회의 공연을 열었습니다. 학전 마당에 세워진 김광석 노래비에는 현재도 사람들이 꽃을 가져다 놓고 있습니다.
 
이후 학전은 뮤지컬, 연극 등으로 갈래를 뻗어왔습니다. 1994년 초연된 '지하철 1호선'은 한국 뮤지컬 역사에 획을 그은 작품입니다. 독일 그립스극장의 원작을 김민기 대표가 20세기 말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새로 그린 작품입니다.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 등 '학전 독수리 5형제'로 통하는 배우들도 이 곳을 거쳐갔습니다. YB의 윤도현은 1995 '개똥이'로 뮤지컬 출연을 처음으로 이곳에서 했습니다.
 
2004년부터는 아이들 정서에 보탬이 되겠다는 취지로 어린이극에도 신경 써왔습니다. 2004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등의 작품을 올려왔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리면서도 김민기 대표는 그간 자신의 음원·저작권 수익을 쏟아부으며 학전을 꾸려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폐관 전까지도 '지하철 1호선(이날부터 1231일까지)', ' 2회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1 6)', '고추장 떡볶이'(내년 1~2) 등을 예정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지난 2019년 전인권, 김수철, 김현철, YB, 권진원, 안치환, 웅산, 강산에, 유재하 동문회, 정원영, 푸른 곰팡이, 김광민 등이 참석한 '어게인 학전 콘서트' 출연진들. 사진=뉴시스
 
문화예술계에서도 학전 폐관 소식에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하림은 "돈 되는 음악만 신경 쓰는 풍토에서 음악가로 살아가는 게 부끄럽다" "어떻게든 가치를 인정받고 보존됐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그간 학전을 거쳐간 음악가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공연도 현재 계획하고 있습니다. 학전 기획실의 최연수씨는 "학전 관계자들 역시 모두 아쉬운 마음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고 있고, 내년 문을 닫는 순간까지 잘 마무리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 기획 공연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김성민 팀장 역시 "공간에 대한 기억을 다시 살려드리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해서 준비는 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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