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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의 한국철학사 32화)한명회 권력욕에 직격탄 날린 김시습

2023-11-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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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권력찬탈의 브레인과 오른팔 구실을 했던 ‘한명회’ 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들어보셨죠? ‘한명회’ 라는 인물. 한명회는 세조가 권력을 잡은 뒤에 한강변에 ‘압구정(鴨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놉니다. 압구정, 한명회 때문에 오늘날 (이 동네가) ‘압구정동’이라는 지명을 얻었죠. 압구정에서 놀면서, 한명회가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한명회의 시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 한명회가 지은 시의 뜻은 젊어서는 사직을 부축하고[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수양대군 세조의 강압적 왕권 찬탈, 계유정란을 도운 일을 가리키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노라[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 한강변에 불법적으로 멋대로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기생들 불러들여 질펀하게 놀았던 얘기를 하는 거죠. 이 시를 한명회는 압구정 정자의 벽에 붙여둡니다.
 
김시습 초상. 이 초상화는 대한민국 보물 제1497호입니다. 조선 시대 초상화는 대개 관복을 입은 인물을 그리는데, 이 초상화는 야복(野服, 관직에 나가지 않은 야인이 입는 옷)에 패랭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드문 작품입니다. 사진=필자 제공
 
어느날 압구정에 숨어든 김시습은 이 시에서 두 글자를 고쳐놓고 사라집니다. 앞 구절의 “부사직(扶社稷)”에서 ‘부(扶)’자를 ‘망(亡)’자로 고치고, 뒷구절의 “와강호(臥江湖)”[강호에 누웠노라]에서 누울 ‘와(臥)’자를 더럽힐 ‘오(汚)’자로 고칩니다. “청춘망사직(靑春亡社稷) / 백수오강호(白首汚江湖)” 이렇게 되면 “젊어서는 사직을 망쳐먹고 /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노라“ 이런 시가 되는 거죠. 김시습은 이렇게 서슬이 시퍼런 세조의 핵심 권력, 당시의 권력의 넘버투 라고 할 수 있는, 한명회를 대놓고 조롱하고 비판했습니다. 그의 권력욕과 탐욕을 풍자하고 비꼬면서 만천하의 웃음거리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권력을 풍자하고 비판할 수 있는 담대함은 오늘날 언론이나 검찰 등의 직업의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 담대하게 권력을 비판하고 풍자할 수 있는 선비 정신의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명회가 지었던 압구정은 오늘날 흔적도 없지만, 압구정이 있던 자리에는 ‘압구정지(鴨鷗亭址)’라는 글이 새셔진 돌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현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의 공터에 서 있습니다. 이 안내문에는 한명회가 지어 압구정 벽에 붙였던 시에 김시습이 내용을 고쳐 그의 권력욕과 탐욕을 풍자 비판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어 넣어야 후대인들에게 이 자리의 역사적 의미를 제개로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세조의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 사육신을 밀고해서 사육신들을 죽음에 빠뜨린 정창손이 영의정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영의정이 거리를 행렬하면, 당시 서민들은 땅에 엎드려 그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김시습은 정창손의 행렬과 조우하고서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땅에 엎드리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정창손이 임마 너! 벼슬 그만해!” 이렇게 소리를 질러 그를 꾸짖었습니다. 이런 일화를 남긴 사람이 김시습이었습니다.
 
수양대군 세조에게 사육신의 단종복위 우동을 밀고해 영의정 자리까지 오른 정창손은 김시습에게 “그 따위로 벼슬하지 말라”는 꾸짖음을 듣습니다. 사진=필자 제공
 
김시습은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수양대군 세조의 권력 찬탈에 인생 최대의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말씀드려도 과언이 아닌데 이 세조가 아무리 조정에 들어오라고 불러도 세조 치하에서는 벼슬자리에 한번도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세조가 부르면 이 사람은 자발적으로 화장실에 뛰어 들어갔어요. 옛날 화장실은 전부 다 ‘푸세식’이잖아요. 푸세식에 스스로 풍덩 빠져서 똥냄새가 진동햐게 만들면서, 똥냄새를 풍기면서 세조 앞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세조가 기겁 질색을 하죠. 이 푸세식 화장실에 뛰어들어가는 김시습의 기행은 세조의 권력이 똥냄새 나는 권력임을 풍자하는 위대한 퍼포먼스였습니다. 이런 기행과 일화를 남긴 사람이 김시습이었습니다.
 
이런 일화와 김시습의 언행은 이자라는 사람이 쓴  <김시습행장(金時習行狀)>이라는 기록, (어떤 사람의 일대기를 조선시대에는 ‘행장(行狀)’이라고 불렀죠.) <김시습행장>이라는 글이 있고, 이산해라는 사람이 김시습의 문집인 《매월당집(梅月堂集)》에다 쓴 <서문(序文)>이 있고, 조선 후기의 최대 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이율곡이 쓴 <김시습전(金時習傳, 김시습 전기)>이 또 있습니다. 이 속에 나오는 일화들과 언행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명회는 세조가 권력을 잡은 뒤에 한강변에 ‘압구정(鴨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놀았던 인연으로 오늘날 ‘압구정동‘이라 불리는 동네의 압구정동 3호선 지하철역에는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을 타일로 묘사한 그림이 지하철역의 홈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사진=필자 제공
 
김시습은 직접 생산자인 백성들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통치자는 이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수 있는 정책을 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문집에는 농민들의 처지를 동정한 시가 여러 편 전해옵니다. 그는 <산간 마을 백성들의 고통을 읊음[영산가고(詠山家苦)]>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거친 밭에 곡식 싹이 자라나면 노루와 산돼지가 먹어버리고(薄田苗長??吃) / 곡물과 좁쌀이나마 수확을 해놓으니 새들과 쥐들이 훔쳐 먹는다.(粟登場鳥鼠偸) / 관아에 세금으로 다 바치니 남은 비용이 없고(官稅盡輸無剩費) / 사채 감당하려니 밭가는 소까지 빼앗겼네(可堪私債奪耕牛) / (…) / 한 집안 열 식구가 거의 초가 한 칸에 같이 살고(一家十口似同廬) / 장정들은 하루도 집에 있는 날이 없네(丁壯終無一日居) / 나라의 노역과 관아의 차출에 고된 일 끌려다녀(國役邑?牽苦務) / 어린 사내와 아녀자들이 봄에 김을 맨다네(弱男兒女把春鋤。)
 
농민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지나친 노역 동원을 비판한 시입니다. 장정들은 나라에서 동원하는 노역[국역(國役)]과 지방 관아에서 동원하는 노역[읍요]에 끌려다니느라 집에 붙어있지를 못해서 어린아이들과 아낙네들이 농사일을 해야 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김시습은 매우 기이한 행적을 않이 남겼습니다. 이자가 쓴 그의 일대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혹은 나무를 깎아 농부들이 밭을 가는 형상을 조각하기도 하였는데, 많게는 일백여 품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을 책상의 한 모퉁이에 두고 하루 종일 바라보다가 문득 통곡을 하고는 모두 태워버리기도 했습니다.
 
이산해(李山海)가 《매월당집》에 쓴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유학을 포기하고 선승과 같은 모습을 하고 다니면서 병이 든 것 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하여 세상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니, 도대체 어떤 뜻이었습니까? 그가 한 행적을 살펴보면, 시를 써놓고 통곡하기도 하고, 나무를 조각해놓고 통곡하기도 했으며, 벼를 베면서 통곡하기도 했고, 고갯마루에 오르면 반드시 통곡을 했고, 갈림길에 서면 반드시 통곡을 했으며, 평생 미묘한 뜻을 간직하고 있어 비록 쉽게 엿볼 수 없었으나, 그 큰 요체는 고름을 얻지 못함에 대한 것[不得其平者]이 아니었겠습니까.
 
율곡 이이가 쓴 <김시습전>에도 그의 기행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이 너무 일찍 알려졌다고 여겨서 하루아침에 세상에서 달아났으니, 마음은 유가이지만 자취는 불가이어서 당시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었습니다. 이에 미친 것처럼 모습을 바꾸어 자신의 실제 모습을 가렸습니다. 지방 자제들 가운데 그에게 배움을 얻고자 하는 이가 있으면, 나무나 돌로 치기도 하고 혹은 활시위를 당기어 쏘려고 하여 그 진실함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문하에 들어오는 제자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또한 산밭을 개간하기를 좋아하여 비록 비단옷 입은 잘 사는 집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밭 갈고 거둬들이는 힘든 수고를 하도록 하여 끝까지 수업을 받는 이들은 더욱 드물었습니다. 산에 가면 흰 나무에 시를 쓰기를 좋아하여 오랫동안 읊조리다가 갑자기 통곡을 하며 지워버리고, 혹 종이 위에 시를 쓰면 또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고 물에 던지거나 불태워버렸습니다. 혹은 나무로 농부가 밭을 가는 형상을 깎아서 책상 한 구석에 세워두고 하루 종일 바라보다가 또한 통곡하며 태워버렸습니다.
 
김시습이 남긴 기이한 행적에 관한 글을 보면, 그는 시를 써서 불태우기도 하고 물에 버려 풀어지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나무로 노동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깎아 바라보며 눈물 흘리기도 하고, 그것을 태워버리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가 물에 버리거나 불태운 시들은 앞에서 인용한 <산간 마을 백성들의 고통을 읊음[영산가고(詠山家苦)]>과 같이 백성들의 고통을 읊은 시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통곡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기이한 행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산해(李山海)는 아마도 그의 기행이 “고름을 얻지 못함에 대한 것[不得其平者]”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고르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하고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측입니다. 김시습은 그의 삶과 저작을 통해 볼 때,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책에서 배운 윤리도덕과 맞지 않는 세상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어서 광기가 발동해 읽던 책을 다 불태워버렸으며, 수탈당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며 이런 세상은 바꾸어야 함에도 바꿀 수 있는 비전이 없어서 통곡으로 한 평생을 살다간 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강압적 수단으로 백성을 다스리려는 통치자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를 남겼습니다.
 
김시습의 사상은 주요 사상은 ‘민본주의(民本主義)’입니다.
“군주들은 폭력으로서 백성들을 억압하거나 협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김시습은 자신의 문집에서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군주에게 협박을 받으면 말을 듣는 것처럼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속에서 반감이 쌓이고 쌓여서, 얼음이 얼고 또 얼어서 두꺼운 얼음이 되듯이, 그 때가 되면 군주가 걷잡을 수가 없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라는 것이 김시습의 주장입니다.
 
한명회가 지었던 압구정은 오늘날 흔적도 없지만, 압구정이 있던 자리는 ‘압구정지(鴨鷗亭址)’라는 글이 새셔진 돌비석이 세워져 있입니다. 현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서 있입니다. 이 안내문에는 후손들이 이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정확히 음미할 수 있도록 한명회가 지어 압구정 벽에 붙였던 시에 김시습이 내용을 고쳐 그의 권력욕과 탐욕을 풍자 비판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적어넣어야 마땅합니다. 사진=필자 제공
 
이런 얘기를 명확하게 글로 남길 정도로 민본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김시습은 어떻게 얘기하냐면, “군주필부지간(君主匹夫之間) 부시호리지상격(不是豪裏之相隔)” 이렇게 얘기합니다. “군주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면 자리를 보존할 수 있지만, 민심이 떠나면 군주는 그냥 필부(匹夫, 평민)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맹자(孟子)가 얘기한 “군주필부론(君主匹夫論)”에 가까운 얘기를 김시습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주와 필부의 사이는 터럭 하나의 차이도 없다! 군주가 백성들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바로 필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김시습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김시습의 사상은 오늘날 보더라도 중요한 민본주의를 담고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김시습은 세조의 권력 찬탈 수양대군이, 삼촌이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란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계유정란에 동참한 학자들과는 절대 담을 쌓았고, 세조 정권에는 참여하지 않는 그런 지조 높은 선비의 모습을 보이면서,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는 철학을 문자로써 정착시켰고, 민본주의를 강력하게 주창한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였습니다.
 
조선 초기 성리학이 (본격) 도입되기 전에, 이런 기철학자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 신라시대의 최치원, 김가기, 김운경 등,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면서 삼가(三家, 유불도)의 가르침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융합적으로 받아들였던, 풍류도적인 지식인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라고 저는 평가합니다.
 
김시습은 조선성리학의 전래 초기에 활동했던 탁월한 기철학자였습니다. 조선 성리학 전래 초기에 활동했던 기철학자는 매월당 김시습이 끝이 아니라, 한 명이 더 나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분이 누구일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인터넷 검색을 해보셔도 좋고, 아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번 글에서는 김시습 선생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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