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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의 한국철학사 25화)이규보 “농민 존경하기를 부처 공경하듯 하노라”

무신정권 가혹한 수탈 비판…글 쓰는 지식인 소명 비춘 삶

2023-09-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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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부터는 고려시대를 살았던 지식인 3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텐데요. 고려시대에는 무신정권 시대를 살았던 이규보, 그리고 몽골 침략기와 원나라 간섭기를 살았던 이제현, 그리고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 시기를 살았던 정몽주, 이 세 지식인의 삶과 태도를 보면서 무력 앞에서 지식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무신정변기를 살았던 이규보 선생입니다. 이규보는 호가 ‘백운거사(白雲居士)’입니다. 그의 문집으로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53권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재미있는 산문을 남겼는데요. <조물주에게 묻다>[問造物]라는 산문을 남겼습니다. <조물주에게 묻다>라는 산문은 “내가 모기, 벌레, 파리 종류들을 싫어하여 비로소 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게 시작하면서, 조물주에게 묻습니다. “사람을 내린 뒤에 오곡(五穀)을 내린 것은, 그것을 먹고 살라고 하는 것이라고 이해가 된다. 오곡을 내린 뒤에 뽕나무, 삼나무를 내린 것은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라는 얘기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먹고 살도록 이로움을 내리는 것 같다.”
 
자신의 시와 문필로서 무신정권의 수탈이 부당함을 기록에 남긴 이규보. 사진=필자 제공
 
그런데 그 뒤에 독이 되는 맹수, 호랑이, 곰, 늑대, 승냥이 같은 맹수를 내리거나, 작게는 파리, 모기, 등에, 벼룩, 이 같은 해충을 내려서 사람을 괴롭히니 이로움을 주고 해로움을 주는 게 이렇게 일관되지 않은가? 라고 묻자 조물주는 “그것은 하늘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또 물었습니다. “하늘은 무위(無爲)하니까, 모를 수 있지만, 당신은 조물주인데 그걸 왜 모르는가?” 이렇게 따져 묻자, 조물주는 “삼라만상은 자생자화(自生自化)하는 것이지, 내가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다.” 조물주에게 계속 따져묻자, 조물주는, “내가 삼라만상을 내손으로 만드는 것을 자네가 보았는가? 나를 왜 조물주라고 부르는지 나조차 알지 못한다”고 답을 했습니다. 조물주가 자신을 조물주라고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답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것입니다.
 
이 산문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지만,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의 철학용어로 말하자면 ‘기계적 유물론’에 해당되는 관점을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규보의 이 글에 따르면 조물주, 인격신의 설 땅이 없고, 만물은 자생자화(自生自化)하는 것이며, 저절로 생겨나고 저절로 번영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철학용어로 ‘기계적 유물론’에 매우 가까운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서 나온 《조선철학사 연구》라는 책에서는, 이규보를 “고려시대의 유물론 사조의 대표 인물”로 꼽고 있습니다. 
 
이규보는 자신을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 가지를 지나치게 좋아한다, 그랬는데 세 가지가 뭐냐면, 거문고와 술과 시이다. 이 세 가지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스스로를 “삼혹(三酷)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규보는 무신정변이 발생하기 직전인 서기 1168년에 태어나서 무신정권이 100년을 갔기 때문에, 평생을 무신정권 치하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고려의 무신정변은,  서기 1170년(의종 24년) 정중부가 중심이 되어 고려 후기에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진압한 김부식 등 문벌 귀족은 숭문 천무(崇文賤武,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시함) 하여 무신을 천시하였습니다. 이에 1170년 정중부 등 무신들은 무력으로 문신을 물리치고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무신 정권은 정중부, 경대승, 천민 출신 이의민, 최충헌, 최우 등으로 100년간 이어집니다. 1270년 몽고에 항복하는 개경 환도로 무신 정권은 무너졌습니다. 무신 정권은 개인적 성향이 강한 불교의 조계종을 후원하여 고려 후기에 널리 발전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신정권 치하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가 무신정권에 아부했던 곡학아세(曲學阿世)한 어용학자라는 비판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맞지 않습니다. 이규보가 최충원이 실권자일 때 최충원이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에서 이규보의 글 솜씨를 본 최충원이 이규보에게 소망이 뭐냐고 묻자, 이규보는 겨우 7급에 해당되는 벼슬자리를 말합니다. “네가 원하는 걸 얘기해 봐! 다 들어줄게!” 이렇게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규보는 공무원 7급 정도에 해당되는 관직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때 당시에 이규보의 벼슬은 8급이었습니다. 이런 일화를 보면, 이규보가 무신정권에 부역한, 어용학자라고 보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사진=필자 제공
 
이규보는 굉장히 많은 시를 남겼는데요. 그 시중에 한 편으로, <신곡행(新穀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신곡행>이라는 시는 굉장히 중요한 시인데요. 일립일립안가경(一粒一粒安可輕), 아경농부여경불(我敬農夫如敬佛), “쌀 한 톨 한 톨을 어찌 가볍게 여기겠나? / 나는 농부를 존경하는 것을 부처 존경하듯이 한다네.“ 부처도 이미 굶주린 사람은 되살릴 수 없다네. 이런 시인데요. 직접 생산자인 농민에 대해서 가장 이만큼 절절하게 표현한 시는 우리 공동체에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라 할지라도) 이미 굶주려서 죽은 사람은 되살릴 수 없지만, 농부들이 만들어낸 곡식은 굶주린 사람이 먹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부처를 존경하듯이, 농부들을 존경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시를 남겼고, 그리고 당시에 나라에서 농부들에게 쌀로 술을 만들지 말고, 쌀로 만든 청주도 마시지 말고, 쌀밥을 해먹지 말라는 국령(國令)을 내렸습니다. 그걸 듣고 분개해서 이규보가 <나랏님 명령[국령(國令)]으로 농민들에게 청주와 쌀밥을 먹지 못하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문국령금농향청주백반(聞國令禁農餉淸酒白飯)]>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시를 지어서 말하기를,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농민들이 일을 해서, 생산물이 나오는 것인데,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나라가 간섭해서는 잘못된 것이다, 라는 (내용의) 시를 남겼습니다. 이 시만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한 편은 <며칠 뒤에 또 짓다>[후수일유작(後數日有作)]라는 시에서,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산열매를 따먹는 원숭이를 나무랬다 / 산에 사니, 산열매를 먹는 것이 도리에 맞기도 하기 때문에, 나무랄 수도 있고, 나무라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산열매와 달리, 곡식은 농부의 노동이 반드시 필요하니, (…) “농부들이 좌식자(坐食者, 놀고먹는 사람)들보다, 만 배는 먹어야 될 것이다[만배좌식자(萬倍坐食者)].”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규보는 이런 시에서, 직접 생산자인 농민들이 가장 중요한 존재다. 국가의 근간이 되는 존재다라고 주장을 했고, 이런 시를 보면 그가 무신정권에 대해서 항의하거나 저항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무신정권에 부역한 어용학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보입니다.
 
《고려사》 <이규보 열전>에 보면,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당시에는 ‘고려 칠현(高麗七賢)’이라고 해서 위진시대의 중국에서 존재했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한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죽림칠현(竹林七賢)‘(그림 사진)이란, 중국의 위진시대에 대나무 숲 아래에서, 세상의 인습과 속박에 얽매이지 않은 채,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거문고를 연주하고 멋대로 시를 짓던 사람들을 죽림칠현이라고 부른다. 그 멤버로는 혜강(?康), 완적(阮籍), 산도(山濤), 상수(向秀), 유령(劉伶), 왕융(王戎), 완함(阮咸) 등 7명입니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이란, 중국의 위진시대에 대나무 숲 아래에서, 세상의 인습과 속박에 얽매이지 않은 채,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거문고를 연주하고 멋대로 시를 짓던 사람들을 죽림칠현이라고 부른다. 사진=필자 제공
 
‘고려 칠현(高麗七賢)’은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등이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해 자칭 부른 이름입니다,
 
칠현 중에 한 사람(오세재)이 죽자 (이담지가) 이규보에게, “당신이 대신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얘기를 했습니다. 이규보는 이들에게 “죽림칠현이 무슨 벼슬자리라도 됩니까? 그 한 사람 죽은 사람의 빈 자리를 다른 사람이 메꾸게, 죽림칠현 당시에 혜강(?康)과 완적(阮籍)이 죽은 뒤, 그들의 자리를, 다른 사람이 메꾸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하니까, 나머지 자칭 고려칠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와하하”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규보에게 시를 한 수 지어보라고 그랬더니, 이규보가 구두로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모르겠노라! 그대들 중에 누가 자두 씨에 구멍을 뚫을 사람인지를~”[미식칠현내(未識七賢內), 수위찬핵인(誰爲鑽核人)?] “자두씨에 구멍을 뚫는다”, ‘찬핵인(鑽核仁)’이라는 이규보의 시 구절은, 죽림칠현 중에서 《진서(晉書)》 <왕융전>을 참고해야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진서》 <왕융전>을 보면,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이었던 왕융의 집에는 좋은 자두가 열리는 자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자두가 열리면, 자두를 따다가 시장에 팔았습니다. 이 좋은 자두의 씨를 누가 구해서 심을까봐, 왕융이라는 사람은 자두를 먹고 나면, 씨에다가 구멍을 뚫어서 버렸대요. 당시 드릴도 없던 시대에 자두 씨에다가 구멍을 뚫으려면,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일일이 구멍을 뚫어서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왕융은 사람들한테 굉장히 인색한 사람이다 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얘기가, 《진서》 <왕융전>에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진서》 <왕융전>을 참고하고 보면, 이규보가 남긴 시가 얼마나 자칭 고려칠현들을 조롱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너네가 위진시대에 죽림칠현을 모방해서 고려칠현이라고 자칭하고 다니지만, 너네 중에도 왕융처럼 자두씨에 구멍 뚫는 사람이 하나쯤 있지 않겠느냐?“라는 조롱인 것이죠. 풍자인 것이죠,
 
《고려사》 <이규보 열전>을 보면 이 기사 바로 뒤에, 재상들이 이규보를 등용하기를 계속 천거를 했지만, “그를 억누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오랫동안 적당한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고려의 자칭 ‘고려칠현’들은 자두씨에 구멍을 뚫는 ‘찬핵(鑽核)’을 한 게 아니라, 이규보의 벼슬자리를 탄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록을 볼 때, 이규보가 무신정권에 아부를 해서 승승장구하고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눈이 멀었던 사람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규보는 (앞의) 산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도가 있는 사람은 이로움이 오더라도 그냥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서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아요. 해로움이 오더라도 그냥 당하기만 할 뿐, 그걸 억지로 피하려 하지 않는다. 빈 마음으로 대한다. “우물여허(遇物如虛)”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이 이규보의 인생 철학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규보는 직접 무신정권에 저항하거나 저항운동을 한 사람은 아니지만, 직접생산자인 농민들의 울분을 시로써 대변하고, “농민들을 존경하기를 부처처럼 존경한다”라는 구절에서, 직접생산자를 소중하게 여길 것을 주장함으로써, 무신정권에 대해서 직접 비판한 것은 아니지만, 수탈에 대해서 비판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어용학자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고, 이규보는 무신정권에 대해서 직접생산자의 노동에 의해서 국부(國富)가 생산되고 경제가 돌아갈 수 있다. 나라의 살림이 이뤄질 수 있음을 일깨워줬던 바른 지식인이었습니다. 글 쓰는 지식인의 소명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삶을 살다간 이였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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