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AI 시대를 맞아 보기 드문 규모의 투자계획을 내놓았다. 정부가 지난 6월 발표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의 중심에는 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가 있다. 반도체를 AI의 두뇌로 키우고, 데이터센터를 연산 인프라로 확보하며, 피지컬 AI를 산업 현장에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여기에 삼성전자와 SK의 장기 투자계획 등이 더해지면서 4,755조 원이라는 거대한 숫자가 등장했다. 다만 이 금액을 정부가 직접 집행하는 투자금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기업의 장기 계획 등을 합산한 규모인 만큼 실제 투자액과 집행 시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4,755조 원이라는 숫자 자체가 아니다. 그 돈을 어디에, 얼마나, 어떤 순서로 투입하느냐다.
현재 계획을 보면 반도체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정부는 서남권에 800조 원 규모의 반도체 생산 거점을 구축하고, 충청권에는 81조 원을 투입해 HBM 패키징 등 후공정 생태계를 키우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AI 데이터센터와 관련 인프라에도 막대한 투자가 뒤따른다.
반도체 투자는 더 확대해도 아깝지 않다.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확보한 경쟁력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반도체에 돈을 많이 쓰느냐가 아니라, 반도체에서 만들어낸 기술과 연산 능력을 다른 산업의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할 준비가 돼 있느냐다.
예를 들어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이 있다고 하자. 대기업 공장에는 AI와 로봇이 들어오는데 정작 협력업체는 오래된 설비와 수작업에 의존한다면 산업 전체의 경쟁력이 함께 올라가기는 어렵다. 조선소에서는 사람이 위험한 작업을 계속하고, 물류센터에서는 작업량과 관계없이 사람이 일일이 물건을 옮긴다면 AI 투자의 효과도 제한적이다.
AI가 화면 속 기술에 머물지 않고 공장과 물류센터, 조선소와 건설현장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10년의 투자 배분은 조금 달라질 필요가 있다. 반도체 60%, AI 데이터센터와 전력·통신 등 인프라 25%, 피지컬 AI와 산업 AI 전환 15% 정도를 하나의 정책 목표로 검토할 만하다.
이는 정부가 확정한 투자비율이 아니다. 반도체는 이미 한국이 경쟁력을 갖춘 분야인 만큼 가장 큰 몫을 유지하고, AI 확산의 병목이 될 전력과 데이터센터를 충분히 확보하면서 상대적으로 투자가 부족한 피지컬 AI와 산업 전환에 힘을 싣자는 제안이다.
특히 15%를 단순히 로봇을 사주는 데 써서는 안 된다. 센서와 모터, 감속기, 배터리 같은 부품부터 제조데이터, AI 소프트웨어, 안전기술, 전문인력까지 국내 생태계를 키우는 데 써야 한다. 중소 제조업체가 AI를 도입하고 싶어도 데이터 구축 비용과 전문인력 부족 때문에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다.
전력망도 투자계획의 앞부분에 들어가야 한다.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가 늘어나는데 발전설비와 송전망이 뒤따르지 못하면 건물을 지어놓고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전력·용수·통신망을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에 함께 묶어야 하는 이유다.
지역 배분도 빼놓을 수 없다. 수도권에 모든 시설과 인재가 몰리면 지방의 산업 기반은 더 약해질 수 있다. 반도체 생산거점과 지역 대학, 연구소, 기존 제조업체를 연결해 지역마다 잘할 수 있는 분야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대규모 투자가 수도권의 부동산과 인프라 부담만 키우는 결과도 피할 수 있다.
결국 4,755조 원의 성패는 투자 규모로 결정되지 않는다. 공장을 얼마나 많이 짓느냐보다 그 공장에서 사람이 AI와 로봇을 활용해 얼마나 더 많이, 안전하게, 효율적으로 생산하느냐가 중요하다.
돈을 크게 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제대로 나누어 쓰는 것이다. 반도체의 초격차를 지키면서 피지컬 AI를 키우고, 전력과 데이터센터 같은 기반시설을 미리 갖추며, 중소기업과 지방 제조업까지 AI의 혜택을 확산시켜야 한다.
4,755조 원이 단순히 거대한 투자계획으로 끝날지, 한국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지는 결국 투자 1원이 현장에서 만들어내는 생산성의 변화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