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가 2026년 하반기 업무보고에서 방한 관광객 4천만 명 달성, 대규모 케이-컬처 행사 ‘패노메논’ 개최, AI 기반 콘텐츠 산업 투자 등 화려한 목표를 내세웠다. 정부가 수치와 대형 이벤트로 성과를 강조하는 모습이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문화 생태계의 다양성과 풀뿌리 문화 향유, 그리고 콘텐츠 산업의 구조적 위기에 대한 깊은 고민이 부족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문제의 본질은 국내 콘텐츠 산업이 글로벌 OTT 플랫폼의 하청 기지화와 대기업 배급·극장 체인의 수직계열화라는 구조적 불균형에 놓여 있다는 데 있다. 방송사와 재벌 계열 자본은 치솟는 제작비로 인해 기획·투자 역량을 상실했고, 그 자리를 글로벌 OTT가 차지했다. 제작자는 IP를 양도한 채 단기 하청업자로 전락했고, 극장은 대기업의 상업성 대작 위주로 스크린을 점령해 중예산 영화와 다양성 영화가 설 자리를 잃었다. 문체부가 내놓은 ‘중예산 영화 지원’이나 ‘AI 대전환 대응’ 같은 대책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다. 글로벌 OTT에 대한 규제와 공정한 수익 배분, 대기업 독과점 방지 등 본질적 처방이 없다면, 정부의 지원은 오히려 거대 플랫폼의 이익만 키울 위험이 크다.
또한, 이번 업무보고는 문화를 국가 홍보나 관광객 유치를 위한 ‘수출품’ 또는 ‘대형 쇼’로 보는 공급자 중심 시각에 머물러 있다. ‘패노메논’이나 ‘골든루트’ 조성 등은 보여주기식 이벤트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문화의 힘은 엑스포나 콘서트장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과 골목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는 이미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진입했고, 지역·세대·계층 간 문화 격차와 소외가 심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정책 구상에는 소수자, 이주민, 다문화 가정이 문화적 주체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다원주의적 철학이 부족하다. ‘문화요일’이나 ‘우리동네 프로젝트’ 같은 이름이 붙었지만, 여전히 대중을 정책의 수혜자나 국가 이벤트의 관객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성과를 과시하는 숫자는 직관적이지만, 창작자의 실험과 비주류 장르, 다양성 영화, 지역 주민과 다문화 구성원이 누리는 문화적 권리는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뿌리가 약한 나무는 화려한 꽃을 피워도 쉽게 쓰러진다. K-컬처가 지속 가능하려면, 국가적 이벤트와 대기업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밑바닥 생태계에 주목해야 한다. 글로벌 OTT와의 공정한 규칙 마련, 중간 제작 생태계 복원, 일상 속 다문화·생활 문화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
정부가 진정으로 향해야 할 곳은 ‘대체불가’라는 구호가 아니라, 무관심 속에 시들어가는 한국 문화의 진짜 뿌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