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영화 ‘사냥의 시간’은 지옥으로 불리는 지금을 살아가는 청춘들에 대한 헌사를 꿈꿨다. 감독의 출발점은 그랬다. 이 영화를 쓰고 연출한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으로 독립영화계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연출자다. 이제훈 안재홍 최우식 박정민 그리고 박해수. 현재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가장 바쁘고 ‘핫’한 배우들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가까운 근 미래다. 국가 시스템이 붕괴한 상황에서 지금을 벗어나고 싶은 청춘들의 탈출기다. 탈출의 소재를 끌어 왔으니, 추격이란 ‘부연’이 따라 붙는다. 설정은 충분하다. 상황은 ‘펄떡’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세계관이 흐릿하다. 그리다 말았다. 구축되지 못한 세계관 속에서 상황만 숨을 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앞과 뒤가 맞아 떨어질 수가 없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아니다. 출발부터 어설펐다.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세계관을 완벽하게 구축하는 지점은 시나리오 작법의 초안이다. 기초 공사가 잘못됐는데, 그 위에 100층짜리 빌딩을 세우려 들었다.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야기는 충분했다.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준석(이제훈). 그리고 그를 마중 나가는 장호(안재홍)와 기훈(최우식). 그들은 친구다. 그들의 세상은 모든 게 무너졌다. 세상은 황폐하다. 지옥 같은 세상이다. 화폐 가치가 붕괴됐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난다. 달러만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 스모그가 자욱하게 깔린 거리는 자연의 법칙마저 거부하는 타락한 세상처럼 느껴진다. 총을 든 강도가 흔하다. 우리에겐 1997년 11월의 그 날이 오버랩 된다. ‘국가 붕괴의 날’ IMF다. 영화에선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준석과 장호 기훈 그리고 도박장에서 일하는 또 다른 친구 상수(박정민). 네 사람은 위험한 계획을 세운다. 상수가 일하는 도박장을 털어 해외로 이주하는 꿈을 꾼다.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하릴없이 평온하게 낚시를 즐길 꿈을 꾸는 그들이다.
영화 '사냥의 시간' 스틸. 사진/넷플릭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계획을 실천한다. 실천은 성공한다. 그들 앞에 꿈은 이제 현실이 된다. 계획은 완벽했다. 하지만 그 계획에 뜻하지 않은 변수가 발생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추격자 한(박해수)이 등장한다. 한은 귀신처럼 그들을 찾아낸다. 그들 앞에 총부리를 겨눈다. 이제 그들은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한은 그들을 풀어준다. 알 수 없는 흐릿하고 서늘한 미소를 짓는다. ‘도망갈 수 있는 곳까지 도망가 봐라’라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핑크빛 달콤한 현실의 꿈은 이제 시커먼 악몽이 됐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한의 추격은 그들에게 현실이 지옥이 아닌 삶의 순간 자체를 지옥으로 만들어 준다.
윤성현 감독은 이 영화를 총 3막으로 구성했다. 1막은 준석과 친구들의 도박장을 털기 위한 ‘케이퍼 무비’다. 2막은 ‘한’과 ‘네 친구’의 숨막히는 추격전을 그린 서스펜스, 3막은 ‘한’과 ‘네 친구’의 대결을 그린 서부극.
영화 '사냥의 시간' 스틸. 사진/넷플릭스
‘사냥의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렇게 3가지로 나눈다면 방향성의 문제가 벌어진다. 교집합이 전혀 없는 세 개의 장르적 특징을 하나로 융합시키려 든 감독의 시도는 참신했다. 하지만 스토리의 동력과 편집의 기본 메커니즘은 다른 방향이다. 하나의 세계관 속에서 각기 다른 감정으로 끌고 가는 장르의 색깔을 끌어 온 것이 아닌, 장르의 동력을 끌어와 버렸다. 계획과 실천 그리고 치밀함이 특색인 케이퍼 무비와 감정을 옥죄는 추격의 서스펜스는 뒤섞일 수 없는 지점이다. ‘한’이 등장하는 지점부터 영화 전체의 톤 앤 매너가 순식간에 뒤바뀌는 지점은 편집의 오점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따를 정도로 괴이하다. 추격 이후 대결 구도로 넘어가는 지점은 흔히 장르 영화에서 기승전결의 구성을 풀어내지 못할 때 차용하는 이른바 ‘감정적 데우스 엑스마키나’(초차연적 존재를 끌어와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처럼 느껴진다. 세계관을 구성하는 지점에서 치밀함을 더하지 못한 연출자의 패착이다. 장르의 장점만 끌어 와 하나로 융합시키려 한 대견함은 있을지언정, 장르적 특색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연출자의 미숙함이다.
영화 '사냥의 시간' 스틸. 사진/넷플릭스
이 영화의 비주얼은 세계관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가장 큰 패착 중 하나다. 감독은 ‘지옥’을 시각화로 끌어 오면서 오롯이 시각에만 집중했다. 슬럼화, 그래피티, 스모그, 채도에만 집중한 조명 선택은 만화적 디스토피아의 그것을 채용한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상상력의 지점에서 명확한 한계성을 드러낸 시각화다. ‘헬조선을 시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가 분명했고, 그 단어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단언이 있었다면 고민을 적게 했거나 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헬조선’이 시각에 있었는지, 내면에 있었는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무형의 권력이 만든 폐단인지는 이미 드러나고 확인된 사안이다.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지점에서 ‘사냥의 시간’의 시각화 세계관은 흐릿하고 멍텅하다.
세계관이 흐릿하기에 인물들의 외침이 공감될 힘을 얻기 부족했다. 도망치고 벗어나고 싶지만 공허하다. 벗어나고 싶어 도망치는 건지, 쫓기기에 도망치는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진다. 모든 게 텅텅 비어 있는 곳에서 흉내만 내고 있는 그들이다. 감독의 전작 ‘파수꾼’의 주인공들이 고민 없이 온실 속에서 자란 뒤 ‘사냥의 시간’ 속 세계관에 던져진 느낌이다.
영화 '사냥의 시간' 스틸. 사진/넷플릭스
3막으로 구성된 영화는 각각의 상황이 적절한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전체로 아우를 세계관이 흐릿하고 멍텅하다. 때문에 상황이 전체를 잡아 먹어 버린다. 공감을 끌어 내지 못하니 집중을 못하고, 집중을 못하니 인물들의 행동에 이입을 할 수 없다. 철저하게 관람을 위한 구성으로만 간다. 바라보고 있지만 바라보는 것 이상을 끌어내지 못한 구성이 됐다.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 들이지 않고 영화 밖으로만 밀어 낸다.
‘사냥의 시간’은 장점이 강하다. 각각의 막은 따로 분리하면 강하다. 네 친구의 어설픈 치기는 ‘파수꾼’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파수꾼’ 네 친구의 미래가 궁금했다. 그들의 몇 년 뒤가 이랬을 것이다. 쫓고 쫓기는 추격은 강력하다. 서늘한 지점까지 있다. 배우 박해수가 만들어 낸 ‘한’이란 인물은 다시 없을 ‘이유 없는 추격자’의 개념을 만들어 냈다. 대결에서 벌어진 총격전은 한국 영화에선 전례 없는 총기 액션과 사운드 디자인을 만들었다. 후반부 청각적 관람은 빼어난다.
영화 '사냥의 시간' 스틸. 사진/넷플릭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묶어 낼 세계관이 없다. 실업률, 슬럼, 그래피티, 스모그 그리고 이질적인 조명. 이 모든 게 지옥을 만들어 낼 것이라 확신한 감독의 완벽한 패착이다. ‘흐리멍텅한 세계관 속에서 상황만 펄떡이는 영화’가 돼 버렸다. 독립영화와 100억대 상업 장편 영화의 경계를 체험한 것이라면 윤성현 감독의 수업료가 너무 비쌌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