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그저 원로에 대한 예우도 아니다. 아역의 똘망한 미래에 대한 박수도 아니다. 때로는 몇 꺼풀을 벗어버리고 바라봐야 하는 것도 있을 듯 싶었다. 그저 그랬다. 영화 ‘덕구’를 보면서 느낀 단상이다.
이준익 사단 연출부 출신인 방수인 감독의 데뷔작인 ‘덕구’는 너무도 뻔한 얘기다. 컷과 컷 장면과 장면의 연결이 예측이 된다. 그 뒤의 장면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럼에도 이 얘기는 예측을 붙잡고 간다. 분명 관객들에게 외면 받을 얘기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눈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우리가 외면하려고 했던 얘기가 녹아 있고 스며있다.
어린 손자 ‘덕구’(정지훈) 그리고 덕구의 동생이자 손녀인 ‘덕희’(박지윤)와 살아가는 할아버지(이순재). 이름도 없다. 그저 자신도 덕구라고 할 뿐이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내 이름이다. 할배 이름 따로 있지 않나”라며 소리를 치는 손자. 왠지 모르게 정겨우면서도 고생스럽고 힘들다. 그렇게 누군가의 부모가 되면서 스스로의 이름을 지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가깝게 있다.
덕구와 덕희에겐 아빠도 엄마도 없다. 그저 마을에선 ‘죽은 남편 목숨값 갖고 도망친 외국인 며느리’란 손가락질이 어린 덕구와 덕희의 엄마를 설명할 뿐이다. 물론 덕구의 기억에 엄마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내쫒기며 울부짖던 모습 그대로가 생생할 뿐이다. 그저 덕구는 아직도 엄마가 필요한 아이일 뿐이다. 얼마 뒤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둔 아이일 뿐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덕구에게 어른이 되라고 강요한다. 원치 않은 웅변 학원을 보내며 자신감을 키우라고 한다. 하고 싶지 않은 대통령이 되라고 강요한다. 집안의 기둥인 장손이라며 조상님 이름을 줄줄이 외우게 한다. 자신도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이지만 더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한다고 할아버지는 강요한다. 그저 놀고 싶고 어리광피우고 싶고, 학교 친구의 게임기가 부럽고 부잣집 친구가 갖고 노는 공룡 로봇을 갖는 것이 소원인 덕구는 어린 아이일 뿐이다.
영화 '덕구' 스틸. 사진/메가박스(주)플러스엠
그런 덕구에게 할아버지는 어른이 되기를 강요한다. 이미 먼저 떠나간 자식과 애지중지 예뻐하던 며느리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자신에게 남겨진 어린 두 녀석을 보살펴야 한다.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 급기야 더 어리고 어린 덕희마저 애정결핍으로 인한 이상 증세를 보인다. 부모가 필요한 아이들의 아픔에 할아버지는 안타까우면서도 버티고 싶은 마음을 담아 내뱉는다. “할배로는 안 되나? 정말 할배로는 안 되는 거이가”
진심이 담긴 이 한 마디는 데뷔 62년차 원로 배우 이순재가 담아 낸 삶의 한 자락처럼 다가온다. ‘지금 영화계에선 찾아보기 힘든 마음이 담겨 있었다’며 이 원로 노배우의 마음을 빼앗은 ‘덕구’의 착함은 사실 우리 사회의 가장 악한 이면이었단 걸 우리는 외면하고 있었다.
보호 받아야 할 약자에 대한 배려 없는 시선과 폭력 그리고 그들을 보듬어줘야 할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문제,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의 어려움 등이 ‘덕구’의 시선을 통해 보다 조금은 따뜻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감독은 바란단다.
영화 '덕구' 스틸. 사진/메가박스(주)플러스엠
너무도 예측 가능한 그래서 확실하게 끝을 향해 달려가는 ‘덕구’의 얘기는 허울 좋은 과장도 없고 그저 예쁘기 만한 화장도 없으며 어색하지만 두터운 분장도 없다. 자연스럽게 놔두고 흘러가는 방향을 바라만 본다. 그 안에서 관객들에게 작지만 분명하게 큰 울림을 전달한다.
팔순을 훌쩍 넘긴 국민 할배 이순재의 연기와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덕구’로 캐스팅된 충무로 천재 아역 정지훈의 울림이 깊은 물결을 만들어 낸다. 그저 이별을 아름답게 그리고 외면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이 ‘덕구’가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영화 ‘덕구’는 가족이기에 더 바라보지 못했던 진심에 대한 얘기를 잔잔히 전할 뿐이다. 며느리와 할아버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 진심은 터져 나온다. 어린 ‘덕구’가 엄마를 찾아 길거리에서 터트린 그 외침이 가슴을 울린다.
영화 '덕구' 스틸. 사진/메가박스(주)플러스엠
‘덕구’는 쉽게 말하지 못한 진심을 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개봉은 다음 달 5일.
김재범 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