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문무일 검찰총장과 이철성 경찰청장 등 우리나라 법치를 관장하는 수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28일 영화를 관람했다. 전두환 정권 말 박종철 민주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다. 무거운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이해관계가 민감하게 상충하는 ‘검경 수사권’ 조정을 앞두고 일종의 탐색전을 치른 셈이다.
법무부 장관과 행정안전부 장관, 검찰총장, 경찰청장이 한 자리에 모여 영화를 보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다. 당사자들은 검경 수사권 조정을 앞두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며 미래를 생각해보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물꼬는 이 청장이 텄다. 지난 18일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검찰과의 수사권·기소권 분리에 대한 조율 문제를 묻는 질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안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내년 초에는 나오지 않을까 싶다”며 “검찰총장이나 행안부장관 등과 그런 만남의 자리를 가지려고 한다. 서로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선수를 쓴 것이다.
이 청장이 넘긴 공은 박 장관이 받았다. 법무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박 장관이 김 장관에게 먼저 영화관람을 제안했고, 합의가 된 뒤에 박 장관이 문 총장과, 김 장관이 이 청장과 각각 시간을 잡아 조율했다고 한다. 시간이 확정되자 지난 22일 법무부는 이 사실을 엠바고(보도시점 제한)를 지정해 언론에 알렸다. 엠바고 지정 시간은 영화관람 당일이었다. 네 사람이 만나는 서울 강남의 영화관과 관람 시각도 당일 공지됐다.
영화관람 당일 이 청장이 가장 먼저 도착해 세 사람을 기다렸다. 5분 뒤 약속시간이 되자 네 사람이 모두 모였고 간단한 인사와 함께 극장으로 들어갔다. 이들 모두 영화를 보는 내내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진지하고 심각한 태도로 상영 내내 스크린을 응시했다. 이들 네 사람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에 따르면, 수시로 자리를 고쳐 앉거나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스크린 쪽으로 몸을 당겼다. 절정 부분에서는 울먹이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를 본 소감도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장관은 이날 오후 8시15분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국가권력이라는 게 언제든 폭력성, 잔인성을 나타냈을 것 아니냐. 민주주의가 약화됐을 때. 그것을 잊지 말라는 아우성인 것 같다”고 답했다.
김 장관은 “저희 세대는 그렇다 치지만 현 세대에게는 저게 바로 우리 역사였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저런 게 가능했던 게 (당시)전부 모두 다 우리 문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일반시민들도 지나가는 버스에서 막 손을 흔들었던 그땐 우리가 다 하나의 공동체였다. 그래서 그게 가능했다. 요즘 세대들도 이 영화를 많이 보면서 우리문제라는 것을 느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 총장은 “젊은 분들이 영화를 많이 보러 왔다.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시대의 이야기인데, 그 당시에 안타까운 일도 많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열망, 염원, 패기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게 모여서 지금 이 시기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 우리 역사고 우리가 배워나갈 부분이라 우리 청장님과 같이 왔으니까 국민 염원을 배우고 깨닫고 가는 걸로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화가 불편할 수도 있었겠다는 말에 이 청장은 “저희가 그 시대를 겪었기 때문에 잘못된 공권력에 대해서 성찰하는 기회를 갖는 시간이었다. 저희 내부적으로도 이런 걸 같이 볼 수 잇는 기회를 준비 중”이라며 “시대에 맞는 인권가치가 잘 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영화가 끝나고 문 총장과 이 청장이 잠시 얘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문 총장이 "우리가 저런 시대를 거쳐서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말하자. 이 청장은 "그렇다"며 동감했다.
김 장관과 문 총장은 사실과 다른 영화 내용을 지적하기도 했다. 극 중 배우 하정우씨가 배역을 맡은 최 검사에 대한 부분이다. 문 총장은 “극 중에는 최 검사가 그만두는 것으로 나왔는데 그 분이 계속 근무하다가 고검장까지 했다”고 바로잡았다. 박 열사와 동문으로 함께 서울대를 다녔던 김 장관도 “(극 중 최 검사가)건달끼 있게 나왔는데 그렇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문 총장 말대로 극중 실제 인물인 최환 검사는 1987년 서울지검 공안 1부장으로 있다가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퇴임해 1999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박종철 열사 사망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 전 고검장은 사건 당시 경찰청 대공 수사관들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박종철 열사의 변사사건 보고서에 날인을 요청했지만 고문에 의한 사망사건임을 직감하고 거부했다. 경찰이 시신을 몰래 화장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바로 '시체보존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서울지검장을 찾아가 직접 사건을 배당맡아 수사했다. 당시 서울지검장은 정구영 전 검찰총장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관련해 이날과 같이 4명이 모두 모이는 일은 앞으로도 드물 것으로 보인다. 문 총장은 “앞으로 자주 모이는 건, 그건 또 논의 해봐야 안다”고 말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문무일 검찰총장, 이철성 경찰청장이 28일 서울 강남구 영화관에서 영화 ‘1987’을 함께 관람하기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법무부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