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일규 전 대법원장이 1988년 7월6일 제10대 대법원장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대법원
[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나는 ‘유신판사’요.”
오는 2일 서세 10주기를 받는 효암 이일규 전 대법원장은 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유신시대 출범에 맞춰 대법원 판사(현 대법관)로 임명된 것에 대한 자조적 표현이다.
1948년 제2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일하다가 6.25 전쟁 중인 1951년 2월 고향인 경남 통영에서 판사로 임관한 이 전 대법원장은 20년간 이른바 향판으로 지방에서 근무했다. 그러다가 대법원 판사로 임명된 때가 하필 1973년 3월이었다. 당시는 이른바 ‘유신 헌법’이 시행된 지 6개월 되던 때로, 매우 엄혹한 시절이었다.
이 전 대법원장은 생전 스스로 ‘유신판사’라고 몸을 낮췄지만 법관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압력에 제대로 항거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정희 정권 공안사건'에서 10여차례 소수의견
12년 8개월간 대법원 판사로 재직하면서 이 전 대법원장이 보여 준 판결을 보면 과연 그렇다.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인 당시는 정보기관 요원들이 법원을 제집 드나들 듯 하던 때다. ‘사법부 독립’ 등 헌법상 원칙은 아예 무시되던 시절이다.
이 전 대법원장은 당시 대법원 재판부가 시국, 공안사건 사범에 대해 중형 선고를 내릴 때 10여 차례나 소수의견을 냈다.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그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법원 상고기각 판결 확정 18시간 만에 피고인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법관 대상 설문조사에서 사법사상 가장 치욕스런 판결로 꼽힌다.
이 대법원장은 대법원판사 13명 중 유일하게 원심의 재판절차에 위법이 있어 파기환송해야 한다고 소수의견을 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 잘못 판단한 책임 있다"
1977년 그 유명한 ‘고영근 목사 긴급조치 위반사건’이 일어났다. 예배 중 “일반인은 묘지를 4평만 쓰라고 하면서 육영수여사 묘지는 왜 2,000평이나 되느냐, 양주 30억 원어치를 수입했는데 유신주역들이 먹지 누가 먹느냐”고 설교했다가 고 목사가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기소됐다. 이 전 대법원장은 고 목사에 대한 상고심에서 “사실을 왜곡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고 대부분 보도된 내용이기 때문에 무죄”라고 소수의견을 냈다.
이런 이 전 대법원장은 최고 권력자에게 눈엣가시였다. 그는 대법원장 시절인 1982년 한 집안 전체에 간첩 누명을 씌운 ‘송씨일가 간첩단사건’ 상고심에서 장기구금·불법수사를 이유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인 당시는 간첩사건에서 수사기관의 장기구금이 보편화 되던 시절이다. 결국 안기부가 이 전 대법원장을 쳐내기 위해 그를 미행하고 도둑으로 위장해 사택까지 뒤졌으나 아무런 흠이 없어 포기했다.
‘EYC총무 김철기 국가모독죄사건’, ‘박세경 변호사 계엄포고령사건’ 등도 이 전 대법원장이 무죄취지의 소수의견을 낸 사건이다.
이일규 전 대법원장이 언론과 취임기념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사진/대법원
대쪽 같은 성품의 ‘통영 대꼬챙이’
이렇다 보니 그를 ‘유신판사’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곧은 성품과 굽히지 않는 소신 때문에 그의 고향 이름을 딴 ‘통영 대꼬챙이’로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통영 대꼬챙이’의 대쪽 같은 성품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이 전 대법원장이 대구고법 판사로 근무하던 1961년 조진만 당시 대법원장이 그를 인정해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발탁하려 했지만 “동기·선배가 아직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인데 서열을 무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사양해 결국 그해 8월 광주고법 수석부장판사로 발령을 받았다.
법관으로서 소신을 지키는 후배법관을 그는 끝까지 책임졌다. 대구지법원장 시절에는 국가안보법 위반 혐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후배 법관이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하자 직접 서울로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을 방문해 강력히 항의해 구해준 일화는 지금도 법관들 사이에 유명하다.
이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것은 ‘제2차 사법파동’ 때문이었다. 1988년 5공화국에서 법원행정처장을 역임한 김용철 대법관이 대법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전국 소장판사 430명이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여파로 김 대법원장이 물러나고 노태우 대통령은 정기승 대법관을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했지만 1988년 7월2일 국회에서 임명 동의안이 부결됐다. 결국 법조계 안팎의 폭넓은 존경을 받던 이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 판사 정년퇴임 2년6개월만에 대법원장으로 취임했다.
정년퇴임 뒤 2차 사법파동으로 대법원장 취임
이 전 대법원장의 수많은 업적 가운데 단연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것이 ‘사법부 독립’의 확립이다.
그 일화로 대법원장 취임의사 타진을 위해 방문한 청와대 정책보좌관 박철언에게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고, 당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노태우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새로운 대법관 구성에서 종래 대법관 후보 2배수를 대통령에게 제청해 낙점을 받던 관례를 깨고 대법관 정수 13명만을 제청해 정치권의 영향력을 차단하기도 했다.
제5공화국 들어 2명으로 늘어난 검찰 출신 대법관 수를 1명으로 줄이고, 제5공화국 시절 대법원 판사 재임명에서 탈락했지만 법원 내 신망이 두터웠던 이회창, 김덕주 등을 다시 대법관으로 기용하는 등 재야에서 4명을 발탁한 일도 지금까지 이 전 대법원장의 업적으로 회자된다.
대법원장·헌재소장이 가장 존경하는 법관
이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 법관이기도 하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대법원장 후보자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누구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인사청문회 서면질의에 이 전 대법원장을 꼽았다. 김 대법원장은 “특히 비상계엄이 해제되어도 1개월 이내에 한해 군법회의의 재판권을 연장할 수 있다는 구 계엄법 23조 2항이 합헌이라고 한 다수의견에 ‘다수설이 헌법 9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한 헌법정신에 눈을 뜨지 못해 헌법적 감각이 무딘 점을 통탄할 따름이다’라고 일갈하던 이일규 대법원장의 소수의견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도 2012년 9월12일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당시 계엄포고령을 위반한 민간인에 대해 비상계엄 해제 이후에도 군법회의 재판권을 일시 적용할 수 있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반대의견을 읽고 법관으로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고 말해 이 전 대법원장이 본인의 법관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이일규 대법원장이 취임 하루 전인 1988년 7월5일 대법원 관계자들과 함께 현충원에 참배하고 있다. 사진/대법원
<이일규 대법원장 약력>
1920년 12월 16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출생
1941년 일본 기시와다(岸和田) 상업학교 졸업
1943년 일본 간사이(關西) 대학 전문부 법과 졸업
1943년 12월 일본 간사이(關西)대학 법문학부 중퇴
1948년 10월 제2회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1949년 8월 경남 통영에서 변호사로 개업
1951년 2월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원 판사로 임관
1957년 3월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
1959년 1월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1961년 8월 광주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1964년 3월 전주지방법원장
1968년 12월 대전지방법원장
1971년 9월 대구지방법원장
1973년 4월 대법원 판사(현재의 대법관) 임명
1981년 4월 헌법 개정으로 대법원 판사로 재임명
1985년 12월 대법원 판사 정년퇴임
1988년 7월 6일 제10대 대법원장 취임
1990년 12월 16일 대법원장 정년퇴임
2007년 12월 2일 숙환으로 별세
<상훈>
1963년 홍조근정훈장, 1970년 황조근정훈장, 1976년 청조근정훈장, 199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