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크게 작게 작게
페이스북 트윗터
(공연+)자본주의 사회 속 처절한 생존기
입력 : 2015-05-18 오전 8:01:43
'사의 찬미'를 노래한 윤심덕의 연인이었던 '모던보이' 김우진. 학창 시절에 이름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테지요. 시대의 가파른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 속에 윤심덕과 함께 몸을 던졌던 비극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이우진은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유일한 극작가로 평가되는데요. 대표작으로는 <산돼지>, <난파>, <이영녀> 등이 있습니다.
 
1900년대 초를 대표하는 이 세련된 감수성의 극작가가 쓴 희곡 <이영녀(1925년작)>가 무려 90년 만에 초연되고 있습니다. 2015 국립극단 봄마당 '근현대희곡의 재발견' 프로그램으로 무대에 오른 것인데요. 그동안 왜 무대화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작품은 동시대적입니다.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이 살던 목포 유달산 밑의 사창가를 무대로 삼아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그렸는데요. 당대 문학의 가장 큰 화두였다는 빈궁이라는 소재, 그리고 여성의 주체적 삶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은 2015년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옵니다.
 
(사진제공=국립극단)
 
중심인물인 이영녀는 세 아이를 둔 평범한 여성이었지만, 남편이 가출해 생계유지를 위해 안숙이네 집에서 창녀로 나선 인물입니다. 그러다 매매춘으로 감옥에 갇히고 교화프로그램의 일종으로 마을 유지인 강참사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의 공장에서 일하게 되지요. 하지만 공장 관리인의 착취와 강참사의 성적 희롱을 못 참고 비판하다 쫒겨납니다. 생활이 막막해 야성적인 유서방과 혼인하나 그의 폭행과 폭언으로 삶은 마지막까지 갈갈이 찢겨나갑니다.
 
연극 '이영녀'는 이 같은 줄거리를 토대로 하되 독특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대중 앞에 섰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연기양식입니다. 박정희 연출가의 잘 짜여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대목인데요. 연출가는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적 연기를 바탕으로 무대를 연출하면서도 군데군데 표현주의적 연기를 삽입했습니다.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해 각 인물의 개성을 극대화해 연기하다가 어느 순간 정지와 슬로모션을 선보이는데요. 과장된 정지와 슬로모션 장면은 인물들이 시대와 환경의 영향 아래 억압받고 있음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원작과 달리 내레이터도 등장합니다. 이 인물은 극 중 인물과 극을 설명해주는 변사 역할을 하는데요. 이 내레이터는 고가구로 가득찬 이곳 무대를 박물관이라 칭하며 역사의 페이지를 열심히 뒤져내, 그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민초들의 삶을 관객 앞에 꺼내놓습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이영녀가 말미에 추는 춤인데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살아남기 위해 쇳기 섞인 목소리로 대거리를 하던 대찬 여성인 이영녀는 어느덧 기력이 쇠해 시름시름 앓는 가운데 잠시나마 꿈 속에서 영롱한 빛 아래 서서 아름다운 춤을 춥니다. 이영녀가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당장의 현실에서는 힘든 일이겠지요. 꿈 속에서나마 한 마리 나비처럼 너울거리는 이영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연민, 그리고 연약하지만 분명한 희망과 바람을 품게 합니다.
 
여러 모로 '잘 빠진' 작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양식을 완벽히 수용하면서 시대적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접근한 이 작품은 왜 그동안 공연되지 않았던 것일까, 김우진의 삶을 소재로 한 뮤지컬도 올라갔는데 왜 정작 그의 작품은 만나보기 힘들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혹시 공연계 사람들이 국내 희곡을 그저 묻혀진 역사의 유물로 치부하고 제대로 돌아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외국의 것이나 새 것만 지나치게 찾아다닌 것은 아닐까. 은연 중에 외국 고전작품에 입맛이 길들여져 버린 것은 아닌지 관객으로서도 많은 반성을 하게 된 작품입니다.  
 
-공연명 : 연극 <이영녀>
-시간·장소 : 5월31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김나볏 기자 freenb@etomato.com
 
 
김나볏 기자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