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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국도극장’, 일상의 마법 열리는 공간
공간이 갖는 ‘힘’, 힘 풀어내는 방법…잊고 지낸 일상 ‘주목’
주인공 중심으로 주변 존재하는 인물들, 일상의 기억 표현
2020-05-27 00:00:01 2020-05-27 20:47:26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공간이 등장하는 영화에는 기본적인 공식이 있다. 공간이 갖고 있는 ‘힘’을 드러낸다. 그 힘은 마법처럼 강력하다. 강력하기 때문에 사건을 만들어 낸다. 얘기를 끌어가는 동력이다. 하지만 그 동력은 사실 별개 없다. 영화란 매체가 갖고 있는 완벽한 선입견일 수도 있다. 일상성의 평범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은 의외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고 느끼고 이어가는 것도 바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동력이다. 굳이 마법을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우린 분명히 마법을 기대한다. 그 기대를 깨는 게 아니라 기대 속에 숨은 힘을 끄집어 낸다. 사건이 아니라도, 발단이 없더라도, 의도가 없더라도, 목적이 없더라도 말이다. 영화 ‘국도극장’이 그랬다. 영화란 매체에게 갖고 있는 우리의 선입견을 ‘국도극장’은 소리 없이 강하게 깨트려준다. 기분이 좋고, 소리가 없이, 잔잔하면서도 일상의 내음을 맡을 수 있는 강함으로.
 
 
 
1999년까지 서울 을지로에서 운영됐던 ‘국도극장’. 하지만 이 영화 속 ‘국도극장’은 전라남도 벌교의 한적한 3류 극장이다. 손으로 그린 간판이 내걸린 극장. 손으로 표를 끊어주는 극장. 40대 이상 중장년층 이상이라면 기억하는 그 시절의 극장. 그 모습이다. 이 극장은 기태(이동휘)와 닮았다. 시대의 흐름에 동화되지 못한 공간처럼. 기태 역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고 낙오한 패배자다. 벌교 최고의 수재로 소문났었고, 서울에서 법대까지 나왔다. 하지만 6년째 매달린 사법시험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잘못하면 굶어 죽을 것 같았다’는 말로 그는 낙향의 이유를 대신한다. 사실 그는 패배한 것뿐이다. 늦은 밤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고, 시간을 때운다. 고향으로 향하던 버스 안 그의 표정은 건조했다. 멍한 시선으로 어딘가를 바라본다. 어디를 바라보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패배한 낙오의 심정이 힘들지는 않다. 기태에게 고향은 따뜻함이 아닌 차가움뿐인 곳이다.
 
영화 '국도극장' 스틸. 사진/명필름랩
 
치매 초기에 들어선 엄마(신신애)는 언제나 형(김서하)이 먼저였다. 기억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엄마에겐 형뿐이었다. 아침 식탁 고기 반찬, 더운 여름날 선풍기 바람조차 곁에 있는 자신의 몫이 아닌 형의 차지였다. 형의 차지가 아니라 원래부터 형의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은 그렇게 있는 듯했다. 싫은 소리 가시 돋은 소리가 튀어나온다. 찔려 차라리 아파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잃어가는 기억 속에서만 머물고 있다. 엄마의 생일 날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기태는 결국 터지고 말았다. 감정이 아닌 생각이 터졌다. 사실 나중에 알았다. 형에게 쏴버린 가시가 아닌 자신에게 쏜 화살이었음을. 그저 자신도 싫고, 엄마도 싫고, 형도 싫었다. 모든 게 싫었다. 도망치고 싶지만 갈 곳도 없다. “서울 올라갈 차비라도 있냐”는 형의 한 마디는 아픈 게 아니라 들켜 버린 자존심이었다.
 
영화 '국도극장' 스틸. 사진/명필름랩
 
그런 기태가 유일하게 기댄 사람이 바로 영은(이상희)이다. 자신과는 정 반대다.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 잡힌 자신과 달리 영은은 보이지 않는 ‘저쪽’을 바라본다. 패배에 사로잡힌 기태와 달리 영은은 힘차고 도전적이다. 기태는 그에게 끌리고 또 끌리다 보니 무언가 바뀌어 가는 자신을 바라본다. 바뀌어 가는 기태의 주변에 있는 극장 간판장이 오씨(이한위)도 그렇고, 기태의 낙향을 비웃던 친구들의 비꼼도 그랬다. 하지만 기태는 조금씩 주변을 살펴보면서 차갑고 낯선 고향이란 공간 속 보이지 않는 힘을 느끼고, 그 힘이 가득한 고향 벌교의 3류 극장 ‘국도극장’에서 자신의 상처를 위로 받으며 보지 않으려 했던 ‘그것’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국도극장’은 공간이 주인공이다. 공간이 담은 힘을 말한다. 그 힘을 드러내고 느끼게 하기 위해 영화는 ‘기태’란 인물의 감정을 오롯이 따라간다. 그 감정은 특별할 게 없다. 사실 특별하긴 하다. 패배와 낙오다. 결코 느껴야 하는 감정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느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될 수 있으면 느끼고 경험하지 않길 바라는 감정이다. 그 감정이 부정적이고 나쁘고 외롭고 힘든 것이라고 할지언정 그 안에 갇혀서 매몰되고 허우적거리는 착각 속에 살지 말라는 게 ‘국도극장’이다.
 
영화 '국도극장' 스틸. 사진/명필름랩
 
바라보지 못하고 살던 주변의 소소한 일상이 우선 착각을 일상으로 전환시키는 장치다. 극장 한 켠에 자리한 재떨이 깡통부터, 극장 바닥을 닦는 대걸레, 극장 입구 돌 바닥에 힘겹게 비집고 피어 오른 이름 모를 들꽃, 코끝을 스치고 뺨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이 소중하다. 잊고 지낸 일상이다. 그 자리에서 그들도 각자의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고, 바라봄이 있을진대 말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 속에서 말하는 진짜 힘은 기억일 수도 있다. 가족의 다툼자리에 우연히 함께 했던 영은과의 첫 만남,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의 편린을 상징하는 냉장고 속 TV 리모콘, 하릴없이 태워지고 피워지고 연기로 사라지는 담배. 기억이란 사라지고 흝어질지언정 분명히 존재했고 또 남아 있던 것임을 기태는 어느 순간 깨닫고 흐릿한 웃음으로 대신한다. 못 먹던 고등어 구이를 젓가락으로 발라 먹으며 기억을 더듬는 순간의 모습은 슬프기보단 잊고 지낸 기억의 조각을 짜 맞추는 아련함으로 다가온다.
 
영화 '국도극장' 스틸. 사진/명필름랩
 
극장 간판이 뒤바뀔 때마다 기태의 감정도 변하고 주변의 인물들도 현실의 기억으로 머물기도 하며 스쳐지나 떠나기도 한다. 극장의 터줏대감 오씨 아저씨도 떠나고, 자신을 비웃던 친구 상진(서현우)도 영은도 이젠 없다. 엄마도 둘째 아들 기태에 대한 작은 기억 하나만큼은 부여 잡은 채 놓고 있지 않았단 걸 형을 통해 듣게 된다. 결국 기태가 잊고 지냈던 것이다. 서울에서 외롭게 지낸 자신의 선택은 선택이 아닌 잊고 지낸 것에 대한 무례함이었다.
 
한적한 날씨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극장 간판은 ‘영웅본색’이다. 평생 기분 좋게 재미있게 본 영화가 ‘영웅본색’이라고 너털웃음을 짓던 오씨 아저씨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영웅본색’ 영어 제목은 ‘A Better Tomorrow’다. 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다릴지언정, 오늘의 지금이 기태에겐 소중하고 새롭다. ‘국도극장’이 그리고 말하는 마법의 힘이다. 일상의 마법을 잊고 사는 우린 모두가 '기태'스럽다. 기태는 ‘국도극장’으로 들어간다. 
 
영화 '국도극장' 스틸. 사진/명필름랩
 
“당신의 ‘국도극장’은 어디입니까.” 개봉은 5월 말.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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