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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시대 열었으니 남북 이질적 요소 거둬내야죠”
더불어민주당 김현 제3사무부총장 "당 현대화 골격 만드는 것 내 임무"
30년 정치현장 지킨 ‘강릉 포목점 막내딸’…안산에서 두 번째 배지 도전
2018-11-13 06:00:00 2018-11-13 06:00:00
[뉴스토마토 차현정 기자] “손이 없어? 어디서 커피를 타라 말라 하나.” 울림 있는 목소리로 커피 심부름을 시킨 선배를 대신 혼내주던 그 외침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1988년 스물 넷 되던 그 해 겨울, 종로의 평화민주당 사무실에서 벼락처럼 깨우친 그 순간은 대학을 갓 졸업한 한 청춘의 인생을 기어이 바꿔 놓고야 말았다. 더불어민주당 제3사무부총장을 맡고 있는 김현(54) 전 의원은 <뉴스토마토>와 인터뷰에서 이해찬 대표와 처음 만났던 30년 전 그 장면을 떠올리며 “그때의 기억이 또렷하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정치권에서마저도 여성에게는 업무와 무관한 커피 심부름이 당연시됐고, 그런 현실에 저항하는 일은 있을 수 없던 때다. 오히려 이를 지적하는 것이 파격이었다. 하지만 평민당 원내부총무를 맡고 있던 서른아홉 당시 이해찬 대표는 뭔가 달랐다고 했다. 김 전 의원은 “모른 척하고 관여하지 않던 선배들과는 처음부터 달랐다. ‘고칠 일’은 단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고 했다. 김 전 의원이 이 대표를 멘토로 여기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다.
 
30년. 김현 사무부총장이 1988년 평화민주통일연구회를 통해 정계에 입문해 줄곧 정치현장을 지킨 세월이다. 평민당에서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당·야당을 모두 경험했다. 당직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2000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보업무로 보냈다. 당과 대국민 가교역할을 담당한 공로를 인정받아 19대 국회 비례대표로 첫 배지를 달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9월에 제3사무부총장에 임명됐다. 지난 8일 안국역 인근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직함 옆 괄호 속에 설명된 ‘미래·홍보·소통 담당’이라는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더불어민주당 김현 제3사무부총장이 지난 8일 안국의 한 카페에서 <뉴스토마토>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당 현대화의 골격을 만드는 게 새로 맡은 임무입니다. 오랜 숙제였는데 그것이 가능한 시기가 됐습니다.”
 
김 부총장은 인터뷰 첫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80만명에 육박하는 당원 모두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를 놓고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작업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민주정부 20년 연속 집권을 위한 당 현대화 작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에 체계적인 당원관리 프로그램이 없어요. 모골이 송연해지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당원 가입 후 개인정보를 직접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이 없는 거예요. 어떤 주제를 놓고 당이나 소속 의원에 제안 또는 청원을 할 플랫폼이 갖춰져 있지 않은 겁니다. 거기에 대해 오랜 고민이 있었죠. 그러다가 지난 전당대회에서 이해찬 대표 체제가 출범하면서 구체적인 당 현재화를 제시했어요. 내년 1~2월에는 성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오는 25일에는 전 당원과 함께 머리를 맞댈 계획이다. 박주민 최고위원을 주축으로 한 가칭 ‘중구난방 더불어민주당 미래를 생각하는 회의’다. 전국 17개 시도당과 253개 지역위원회의 홍보 담당 조직과 전 당원이 참석자다.
 
돌고 돌아 다시 소통이다. 당과 당의 미래를 사랑하는 지지자인 당원·당직자들과의 소통이라고 김 전 의원은 말했다. 그동안의 공보역할이 간접소통이었다면 이제 직접소통이다. “‘정치인생 대부분을 공보업무만 했는데, 하다하다 미래홍보까지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듣고 있어요.(웃음)”
  
모친의 기일이 된 노무현의 10·4선언 기념일…"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 약속"
 
첫 방북의 감동에 벅찬 시간이었다. 10·4선언 11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찾은 평양 고려호텔에서 점심을 먹을 때까지 그랬다. 방북 하루 전 어머니를 찾았을 때만 해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지난달 4일 김 부총장은 모친상을 당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은 건 그날 저녁 평양에서다.
 
서울로 돌아갈 방법이 원천적으로 없다. 북경을 경유하려해도 여권이 없다. 눈앞이 캄캄했다. 모든 것을 안 이 대표가 북측에 상황을 알렸고, 갑자기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무렵, 육로를 통한 귀경이 결정됐다. 다음 날 아침 7시40분 고려호텔을 출발했다.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 도착한 시간은 9시40분이다. 오후 1시에는 장례식장이 마련된 서울 한양대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점심 무렵 장례식장에 가니 조문객들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못 내려올 줄 알았다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생기고 긴급한 상황이 발생해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이 처리된 첫 케이스가 됐어요. 관혼상재를 존중하는 한민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70년 떨어져 살았지만 5000년을 같이 살았잖아요. 북측의 많은 위로와 애도의 표현을 받았어요.”
 
아흔 둘에 소천한 모친의 건강은 오래 전부터 편치 않았다고 했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1남3녀 막내딸의 애잔함은 말로 설명이 어려워 보였다. 김 부총장은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강원도는 남북 분단의 고통을 온전히 가진 고장이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작한 포목상을 50년 넘게 했어요. 자로 사람 몸의 치수를 재요. 한마는 90센티. 옷감을 자르는 일이 정교한 작업인데, 실크에 흠날까 손에 상처 하나 생기는 것까지 경계하셨어요. 자기관리가 철저할 수밖에 없는 일이예요. 엄마 솜씨가 좋아서 포목상은 항상 동네 사랑방처럼 손님이 많았어요. 막내인 저는 공부도 거기서 하고 밥도 거기서 먹고 동네어른들 귀여움도 받으며 자랐죠.”
 
오래가진 못했다. 한양대 재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던 그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민당 학생대표로 입당해 제도정치권에 발을 디디면서다. 부모님은 귀가 따갑도록 ‘포목점집 막내딸은 빨갱이’란 말을 들어야 했다. 보수 성지로 불리는 강릉은 자유한국당의 전신이자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정의당의 지지세가 강했다.
 
“부모님은 극구 반대했어요. 하지만 머리 다 큰 자식인데, 말린다고 되나요. 대신 매일 말했어요. 좋은 세상, 평등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으로 돌려드리겠다고. 할머니의 응원도 힘이 됐습니다. 교육 한 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우리 할머니는 ‘평등은 중요한 거다. 다치지만 마라, 맨 앞에 서지만 마라’ 하셨거든요.”
 
부모님도 결국엔 김 부총장의 편에 서더란다. 뒤에서 수군대던 동네사람들은 모두 부모님한테 혼쭐이 났을 정도다. 인터뷰 도중 그가 작은 삼베주머니를 꺼낸다. 그 안엔 잘 닦여 반질반질한 의원배지 3개가 들었다. 하나는 비례대표가 되던 날, 이 대표로부터 선물 받은 배지, 또 하나는 김 부총장이 달던 거다. 나머지 하나는 강릉 집에서 유품정리를 하다 찾았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고 처음 어머니께 달아드렸던 그 배지다.
 
"세월호 유가족 평생 보듬으며 늦지 않게 안산 발전에 기여하겠다"
 
“세월호 유가족을 평생 보듬으며 살겠다고 한 엄마와의 약속은 꼭 지킬 겁니다.”
 
김 부총장이 안산 단원 지역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이유다. 세월호 유가족이 겪은 고통은 그가 해결해야 할 큰 숙제라고 했다. 중앙정치무대에서 활동한 경험을 토대로 더 늦지 않게 안산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김 부총장이다.
 
“안산은 생동감이 있고 교육열이 남다른 도시예요. 하지만 지난 정권에서 세월호 사태가 국면전환용으로 악용되고, 대통령의 지지회복 도구로 쓰이면서 갈등이 형성됐어요. 진상조사는 더디고 더 큰 갈등이 유발되다보니 시민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금이 그어졌습니다. 제가 통합과 소통에 나서는 이유입니다. 오랜 시간 정치권을 경험했고 청와대에서 국정운영 경험도 쌓았고 중앙정치 무대에서 활동한 경험은 기본적 네트워크가 됐어요. 제가 가진 인적자산을 최대한 활용해 안산에서 쏟고 싶어요.”
 
지역주민의 고통을 외면하면서까지 잘못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보수야당에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세월호 추모공원을 납골당으로 낮춰 부르며 마치 화장터가 들어오는 것으로 곡해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온당치 않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겠다”고 밝혔다. 당은 현재 2020년 총선 공천을 앞두고 내년 4월까지 공천 기준 마련을 위한 선출직 공직자 평가위원회를 가동한 상태다. 공천을 앞둔 지역위원회 당무감사도 내년 상반기 내에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지난 2012년 19대 국회 당시 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와 김현 의원이 국회에서 열리는 국회 개원식 및 본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마지막으로 정치인으로서의 목표가 뭔지 물었다.
 
정치인으로서의 목표가 뭔지 물었다.“1988년 이 대표에게 ‘우리가 언제쯤 정권교체를 할 수 있을지’를 물었더니 30년은 걸린 것이란 답변이 돌아왔어요. 1997년에 하늘이 도와서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가 들어섰지만 비주류로서 기반이 취약한 탓에 이명박정부, 박근혜정부로 넘어간 것이죠. 사실상 평화와 통일 이슈가 내면화돼서 종북론이 해소되지 않으면 정권이 교체돼도 온전치 않았음을 기초한 겁니다. 88년 당시 이 대표의 진단은 정권교체와 통일을 위한 진전까지 다 내다본 것으로 해석이 돼요. 정권교체까지 30년 걸렸으니 이제 남은 건 남북 간의 이질적 요소를 거둬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고 삶의 방식과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30년이 남았다고 봐요. 그때까지 역사 내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목표입니다.”
 
 
차현정 기자 ckck@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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