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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포스코)“안정된 주거, 생산성 증대 바탕” 청암의 의지
(3)소극적 병존의 시대(상)
2018-10-21 06:00:00 2018-10-21 06:00:00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포스코 설립자 청암 박태준 명예회장은 사원들을 위한 주거 복지 문제에 대해 처음부터 각별한 관심을 할애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포항의 도시 발전과 도시 경관 자체를 크게 바꾸었다.
 
기업인으로서 청암이 주거 및 도시 환경에 대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기업의 설립과 성장에 직결된 경제적 이유였다. 포스코가 처음 입지하게 될 영일만 일대 230만평은 당시만 해도 사막과 진배없는 모래밭이었다. 이곳에 유능한 인재를 불러 모으고 붙잡아 두려면 사원들을 위한 주택과 학교를 회사가 미리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창업 초기에는 자원의 낭비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우수 인력 유치와 이직 예방이라는 측면에서 경제적 이익이었던 것이다.
 
청암 자신도 “안정된 생활 터전의 마련이 곧 생산성 증대의 지름길”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고, 포스코 내 주택단지 조성은 가족의 이산 방지책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주거를 위시한 복지후생 제도가 포스코에서 특히 발전한 이유에는 제철공장이라는 특수성도 포함된다. 제철공장은 고로의 불을 끌 수 없기 때문에 연중무휴의 3교대 근무제가 불가피하다. 따라서 직주 근접의 작업 환경이 불가피하다. 총파업과 관련해서도 자동차공장과 제철공장은 사정이 판이하다. 자동차공장은 세웠던 라인을 가동하면 쉽게 정상 조업에 복귀하지만, 제철공장은 못 쓰게 된 용광로를 통째로 갈아 치워야 하는 등 그 자체로서 파국을 맞는다. 평소 복지후생 제도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다.
  
지난 2005년 10월21일 오후 포스코 포항주재 직원들과 외주파트너사 직원 그리고 자매마을 주민들 3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2005년 포스코가족 한마음 걷기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2냉연공장에서 축구전용구장까지 약 3.8km 거리를 걷고 있다. 청암 박태준 포스코 설립자는 포항제철소 건설 이전부터 임직원들의 안정된 주거가 제철사업 성공을 결정한다고 보고 각종 복지 방안을 마련했다. 사진/뉴시스
 
사실상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안정된 주거 공간이야말로 좁게는 기업의 성장, 넓게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기본 전제 가운데 하나다. 유럽의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도입된 이른바 박애주의 전략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주택의 안정적 공급을 통해 주거 복지의 실현과 집단 행동의 예방을 동시에 겨냥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가족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결합이었다.
 
하지만 청암의 주거관은 이러한 단순한 경제적 차원을 훨씬 능가했다. 그는 인간의 주거 환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3대 원칙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로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나라 성인들의 소망 혹은 1960년대 기성세대가 가진 보편적 소망에 부응하는 경영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때 그는 미래를 보장하는 안정된 직장을 얻으려는 소망, 내 집을 소유하려는 소망, 그리고 자녀를 좋은 학교에서 공부시키려는 소망 세 가지를 꼽았다. 셋째는 길게 내다보면서 교육 시설과 주거 환경을 세계 최고로 가꿔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제철소 건설을 위해 유럽 등지를 출장할 때도 공장과 제철소만 둘러본 것이 아니라 숲속의 주택단지와 학교도 유심히 살폈다고 한다.
 
청암의 주거관은 포스코 건립을 앞두고 급조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는 그의 평소 소신이나 신념과 같은 것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군정 내각 상공 담당 최고위원이었던 청암에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경제개발5개년계획 시행을 염두에 두고 철의 중요성과 제철공장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자 청암은 대뜸 ‘숲속의 사원 주택단지와 제철소의 녹화’를 꿈꾸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청암이 1964년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으로 부임했을 때 강원도 상동 광산 현장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화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는 대한중석 광산 노동자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던 낮은 사기의 원인을 일제 시대에 산기슭에 지은 헛간 수준의 사원 주택단지나 열악한 병원 및 학교 시설에서 찾았다. 이후 그는 ‘종업원의 후생 복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회사 방침’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1960년대 후반 한국은 광주대단지 도시 폭동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산업화 초기 상황에서 주택난이 전반적으로 심각한 시점이기도 했다. 광주대단지 도시 폭동은 1971년 8월10일, 현 경기도 성남시 구성남(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현 수정구 및 중원구 일대)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다.
 
청암은 포항제철소를 짓는 과정에서 자신의 평소 신념을 주저 없이 실행해 나갔다. 그 무렵 그가 쏟아낸 각종 어록이 이를 웅변한다. 가령 “주택단지를 건설하는 데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집은 자자고 밥 먹는 곳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주택단지를 완전히 공원화하여 직원들에게 쾌적한 주거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직원 복지 정책에 대하 기본 방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우리 포항제철만이라도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공장과 주택단지가 되어 이런 좋은 기풍이 지역 사회로,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오랜 숙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가 궁극적으로 염두에 둔 것은 모델 주거 단지 혹은 시범 전원 도시였다.
 
아닌게 아니라 포스코는 공장을 짓기 전 사택을 먼저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1968년 1월 포항시 효자동에 사원용 주택단지 조성 공사를 시작해 1978년 말에는 자가 주택 3611세대, 독신자 기숙사 11동(3771명), 임원 숙소 1동, 외국인 숙소 18동(320명) 등 대단위 사원 주택단지 조성 사업을 완료하였다. 또한 1997년에는 신주택단지를 개발하여 4000세대의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였다. 특히 포스코는 장기 저리은행 이자를 알선하여 직원의 자가 주택 제도를 실현하였다. 이는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자기 집을 갖겠다는 직원들의 염원에 화답한 것인데, ‘자가 주택’이라고 명명한 것은 통상적인 임대 주택이나 사택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포스코의 사원 주택단지는 전원 도시(Garden City)의 이미지를 강하게 풍긴다. 포스코는 환경오염의 우려를 보기 좋게 불식한 것이다. 포스코가 처음 들어설 당시만 해도 환경 문제에 대한 전망은 극히 어두웠다. 서울대 도시및지역계획연구소 보고서에 의하면 ‘공해에 의해 포항시 전역이 완전 오염되어 주민의 생활이 불가능해지는 경우에는 의창면이나 안강읍 근방으로 주민을 이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현재 포스코의 주택단지는 ‘낙원 같다’는 평가를 듣기도 하고 ‘한국의 비버리힐스’라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주택단지의 3분의 2 이상이 숲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 기존의 자연 환경을 최대한 살리고 온갖 나무를 심어 철저히 가꾸며, 인공 연못을 꾸미고, 숲속 산책로를 낸 결과다. 1992년 7월 모스크바 대학 빅토르 사도비니치 총장이 포슼코를 방문했을 때 쾌적한 주거 환경과 주택의 개인 소유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그는 “레닌 동지가 꿈꾸고 추구한 이상향을 저는 포철에 와서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자료: 박태준과 지방, 기업, 도시 - 포철과 포항의 병존과 융합, 전상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나무위키)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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