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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재벌 세습과 언론의 무비판
2018-10-04 16:01:29 2018-10-04 18:32:41
"사실, 내부적으로 걱정이 많았습니다. 다행히도 좋게들 바라봐 주셔서……."
 
끝맺지 못한 말 속에 그간의 긴장감이 녹아 있었다. 마음 졸이며 속앓이를 했지만, 그의 말을 빌면 '다행히도' 기우였다. 우군은 언론이었다. 모두들 '구광모 시대 개막'이라는 타이틀로 LG의 4세 경영을 반겼다. 신임 구광모 회장이 어떤 인물인지, 임직원 21만여명의 재계 4위 LG를 이끌 경영능력이 검증됐는지는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그렇게 베일에 가려진 만 40세의 젊은 회장은 언론의 축복 속에 LG의 정점에 올랐다. 
 
언론은 지나쳤지만 LG 내부적으로는 걱정이 컸다. '세습경영'에 대한 언론의 시각과 여론의 반감을 어떻게 대응할지 적당한 답을 찾아야 했다. 재벌개혁을 기치로 내건 정부 눈치도 살펴야 했다. 고인이 된 선대 회장의 장자라는 이유는 세습 외에 그 어떤 명분도 주지 못했다. 더욱이 대를 잇기 위해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입적까지 했던 LG였다. 딸들은 경영에서 원천 배제됐다. 정말 다행히도 창업주(구인회) 이래 구자경, 구본무 역대 회장들 모두 LG를 잘 이끌어 왔기에 탈이 없었지만 따지려면 따질 수 있는 게 장자 세습 원칙이었다. 이 같은 가부장적 가풍은 LG를 다른 그룹들과 달리 총수 리스크부터 자유롭게 했지만, 그렇다고 세습의 답이 되지는 못했다. 오로지 장자의 판단에 그룹의 명운을 맡겨야 하는, 전근대적 문화가 LG의 본질이었다.
 
그렇게 걱정에 걱정을 했지만 언론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게다가 한진을 비롯한 타 그룹들의 총수일가 갑질이 계속해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면서, 같은 문제로 구설수에 한 번도 오르지 않은 LG와 대비됐다. 구본무 회장의 타계 이후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생전 미담도 소개되며 오히려 LG를 재계의 모범으로 바라들 봤다. 이는 신임 구광모 회장에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유산이 됐다. 본지가 그를 '대한민국 재벌 신뢰지수' 조사대상에 포함시킨 첫 달부터 총수 부문 신뢰도 1위를 꿰찬 원동력이었다.
 
이 같은 세습은 비단 LG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도 같은 고민을 했다. 오랜 세월 공을 들여 3세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승계 작업은 해놨지만 이는 지배구조와 지분의 문제였을 뿐,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후 삼성을 대표하게 된 이 부회장을 어떻게 바라볼지 적잖은 걱정과 고심을 해야 했다. 하지만 역시 언론이 이 같은 걱정을 덜어줬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축하했다. 그가 삼성에서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삼성의 미래를 위해 어떤 비전을 제시하는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서 '삼성공화국'의 오명을 벗고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지 등에 대해서는 묻지도, 검증하지도 않았다. 삼성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걱정이 컸었다"는 말로 대신했다.
 
미국으로 눈을 돌리면 세계 최대 호텔 체인을 보유한 메리어트는 아들이 아닌 아르네 소렌슨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세습과 단절했다. 빌 메리어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길 원했지만, 회사를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요점은 '능력'이었다. 문어발식 경영의 상징인 록펠러 역시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고 있다. 록펠러는 반독점법 도입 이후 경영에서 퇴장하는 용단을 내렸고, 이는 록펠러를 미국 최고의 명문가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그리고 이를 위해 갖은 편법을 동원하는 한국의 재벌과는 결이 다르다. 여기에 언론이 헌신하고 있다. 
 
김기성 산업1부장 kisung012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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