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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의 재계시각)떠나려는 대만 기업, 지키려는 한국 기업
전쟁 위협 상황이 경제체제 차이 불러
2018-08-19 15:10:36 2018-08-19 17:36:22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고 이맹희 전 CJ 명예회장은 지난 1993년 발간한 자서전 ‘하고싶은 이야기’에서 전체 책 분량의 10분의 1에 달하는 30여 쪽에 걸쳐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내용 가운데 눈에 띈 대목은 대만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중소기업 중심 체제인 대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로 나라가 처한 사정을 감안해 색다르게 설명했다. 요약하면, 대만이 가족 중심의 중소기업 체제를 이룬 배경은 본토(중국)에서 피난 온 중국인들의 타인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소수의 피난민들은 대만 경제를 이끄는 주류가 되었지만, 그들은 늘 언젠가 대만을 떠나 고향이나 또는 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떤 결정을 내릴 지 여부는 중국과 대만이 전쟁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남북한 긴장 관계마냥이나 양안관계는 대만 경제에 늘 불안의 씨앗이다. 대만 기업들이 중소기업 중심으로 투자 후 2~3년 후에는 투자 분을 회수하게끔 계획을 잡는 것도 그들이 늘 불안한 생각 속에서 기업을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러한 특수한 상황이 투자 금액의 회수가 비교적 빠른 중소기업을 선호하게끔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흔히 기업의 자본금과 기업 소유주가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부(富)의 양을 비교해 볼 때 대만 경영인들은 현금 보유에 더 큰 비중을 뒀다고 한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딴 나라로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용성이 큰 현금이나 금붙이 등을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건물이나 공장 설비 등은 처분을 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만 기업들은 대부분 대만 내 기업에 투자된 재화의 크기만큼, 외국에 현금이나 유가증권, 혹은 귀금속 등을 마련해 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럴 정도로 그들은 외국으로 나갈 준비를 항상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015년 8월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맹희 CJ 명예회장 영결식장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이 명예회장은 생전 발간한 자서전 '하고싶은 이야기'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관계에 대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생각을 밝혔다. 사진/뉴시스
 
반면 한국은 대만과 달랐다. 이 전 명예회장은 “우리는 별다른 느낌 없이 그냥 지나치는 일이지만, 외국인들이 보기엔 한국의 수도 서울의 불과 40km 북방에 군사분계선이 있고, 그 이북에는 호전적인 집단이 늘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항구적인 큰 건물을 짓고 공장을 세운다는 사실은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놀라운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늘 북쪽의 전쟁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100년 이상 사용할 공장을 짓고 지하철을 만들고 또 건물을 세우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외국 경제 전문가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보편적인 놀라움이었다.
 
대기업이나 재벌기업의 투자라는 것은 규모나 투자 기간이 길기 때문에 “언젠가 부서질는지 모르고, 혹은 전쟁이 터지면 어차피 버려두고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대기업들이 성장해 왔다. 대기업이나 재벌 기업을 만들려면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겠다는 의식이 중요한데, 한국 기업인들은 적어도 한국에서 기업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밤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일한 사원들, 기업 운영에 인생을 건 임원들의 노력과 경제 재건을 위한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도움이 되어 현재의 성공을 이뤄낼 수 있었다는 게 이 전 명예회장의 생각이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체제가 위협적인 것일까? 한 경제단체 관계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스타트업 강국으로 떠오른 이스라엘을 배워야 한다는 바람이 불었던 당시, 이스라엘 정부 관계자를 만났는데 오히려 이들은 “한국은 어떻게 대기업을 그렇게 많이 키워낼 수 있었느냐”며 한국의 기업가 정신을 배우고 싶다고 요청하더란다. 이스라엘 기업가들은 스타트업이 성공하면 매각하려고만 할 뿐 본격적인 기업으로 키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장차 자국 산업구조가 불균형화 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시 중동국가들과의 분쟁 장기화에 따른 불안감이 반영된 것도 스타트업이 발달한 이유이지 않을까? 대만도 2000년대 들어 대기업화와 함께 중소기업 사업장 중국 이전 등으로 인해 입지가 많이 축소되어가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국가 경제의 뼈대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중 어디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나라의 과거 역사나 문화적 분위기와 연관되어 그 나라에 맞는 독특한 체제로 갖추어지는 것이지 획일적으로 어느 체제가 경쟁에서 유리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어떤 체제가 되었든지 간에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여야지 적대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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