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곤의 분석과 전망)JP, 1926~2018
입력 : 2018-06-25 06:00:00 수정 : 2018-06-25 06:00:00
지난 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26년’과 ‘2018년’이라는 생몰년도에 담긴 의미 이상으로 현대사를 온 몸으로 구현한 인물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같은 김씨 성을 지닌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과 그를 함께 ‘삼김’으로 묶는 것이 적절한 가에 대한 논란은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입체성’ 면에서는 그가 두 사람보다 훨씬 도드라진다.
 
1926년 충남 부여 출생, 식민지 시절 부여와 공주에서 초중등교육을 받음. 해방 이후인 1946년 서울대 입학.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육군사관학교 입교 및 임관. 1950년 육군중위로 6·25를 맞음. 1960년 4·19 이후 장면 정권에서 육군 중령 신분으로 정군 운동을 벌이다 항명파동으로 강제 전역. 1961년 5·16 군사 쿠테타 주도, 재입대 후 육군 준장으로 전역. 중앙정보부 창설. 1963년 공화당 창당. 1964년 한일협정 주도. 1971년 국무총리. 1979년 공화당 총재 선출. 1980년 신군부 군사쿠테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정치 은퇴. 1987년 정치복귀 및 신민주공화당 창당. 1989년 3당 합당. 1995년 민자당 탈당 및 자민련 창당. 1997년 DJP연합 결성. 1998년 국무총리. 2004년 17대 총선 비례대표 출마 및 낙선. 정계은퇴선언.
 
별세 전 10여년을 제외하더라도 그의 인생 역정을 짚어보는 것 자체가 숨 가쁘다. 식민지, 해방, 정부 수립, 전쟁, 쿠테타, 근대화-산업화, 민주화, 지역주의, 정권교체가 다 담겨있다.
 
이 정도 되는 인물은 인생의 공과를 평가받는 것이 마땅하다. 종합적으로 김종필 전 총리에 대해선 김영삼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비해 공의 무게를 적게 두고 과의 무게를 크게 두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공과의 대차대조표 항목들이 김종필 전 총리보다 길고 복잡할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유신 이후 4공화국과 5·16 3공화국을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견해들도 많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평가도 복합적이다. 3당 합당과 DJP연합은 더더욱 그러하다. 자민련이라는 이름은 지역주의의 상징인양 소비되고 있지만, 기실 지역주의의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 중 김종필 전 총리가 제일 윗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엄청난 독서량과 예술적 소양, 탁월한 언어 구사력, 조직과 행정을 다루는 능력, 보수에 중심을 두되 시대변화에 저항하지 않는 유연성 등 개인의 자질만 두고 보면 나머지 양김에 뒤질 것도 없어 보인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만약 1972년 10월 유신이 없었다면? 1979년 10·26 당시 최규하의 자리에 김종필이 있었다면? 정치, 사회 민주화나 경제 선진화와 북방외교 등의 이행기 역할을 톡톡히 해서 전문가들에 의한 평가는 상당히 높은 노태우정부의 모습을 훨씬 빨리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신군부 세력은 못 등장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만약은 만약일 뿐이다.
 
현실, 특히 김종필의 21세기는 싸늘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민주화 이후 첫 일대일 구도 격돌이 벌어진 2002년 대선에 그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도입된 2004년 총선,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겠다’면서 자민련 비례1번 후보로 나섰지만 낙선하고 대신 민주노동당 비례 8번 노회찬이 국회로 입성했다. 이어진 정계은퇴 선언, 장외 인생 10여년. 막후 실력자라 할 수도 없고 지혜로운 현인의 면모를 보여줬다고 볼 수도 없는 세월이었다.
 
그리고 별세. 1987년 6월 항쟁으로부터 불과 2년만의 3당 합당으로 열린 한국정치구조의 보수우위가 완전히 붕괴됐음을 알린 6·13 선거 열흘 만에 눈을 감았다. 모두가 같은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는 삶이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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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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