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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고종, 그리고 문재인-김정은
2018-06-07 06:00:00 2018-06-08 13:52:19
이강윤 칼럼니스트
140년 전, 조선후기 때 처럼 또다시 미-중-일-러가 한반도 지분확보를 위해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우리는 100년 넘게 ‘지정학적 비극’이라거나 ‘약소국 설움’이라 부르며 불가피한 걸로 받아들였다. 오죽하면 교과서에 그렇게 쓰고 가르쳤겠는가. 4.27 남북회담 후 워싱턴과 판문점, 싱가폴, 평양, 베이징 등지에서 여러 형태와 성격의 회동이 동시다발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주변국들의 지분확보전은 140년 전과는 그 성격과 양상이 현격히 다르다.
 
가장 큰 변화는, 일단 현재의 한반도가 140년 전의 ‘상투 튼 조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때와 달리 두 개의 국가가 있으며, 그 중 한 곳은 핵을 갖고 있다. 핵은 그저 가공할 무기 중 하나가 아니라, 정치-외교적으로 차원이 전혀 다른 의미와 힘을 지닌다는 건 상식 중 상식. 국제질서는 핵보유국과 비보유국으로 나뉘기도 한다. 지금 한반도 주변정세가 지각부터 요동치는 근본 원인은 두 말 할 필요없이 북의 핵 보유다. 남한은 경제사이즈 10위권에, 주변국들로부터 무시당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성장한 지 오래다. 그러나 냉전체제와 진영대립이라는 큰 틀 아래에서 한반도는 주변국의 이해각축장이 돼왔고, ‘힘의 균형’이라는 이름 하에 분단체제를 강요받았다. 한 마디로 주변국에 의한 질곡이자 희생이었다.
 
140년 전 조선은 고종과 대원군, 척사파와 친일-친러파가 우왕좌왕했다. 물가에 혼자 나간 아이처럼 풍전등화였다. 생산력침체로 경제는 피폐했고, 삼정문란 등으로 민심이반은 극에 달했으며, 정부는 행정력과 통제력을 잃어 국가시스템 자체가 붕괴 직전이었다. 지금은? 전술한대로다.
 
급변을 거듭하는 대화국면에서 패싱 당하지 않으려, 어떻게든 숟가락을 유지해보려는 주변국들은 이 근본적 변화를 물론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이 현 국면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무리수’를 두지 않기를 기대한다.
 
일본 아베 총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워싱턴으로 러시아로 달려가며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려 애가 탄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한 달 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베이징과 다롄에서 두 번이나 만나 ‘밀담’을 나눴다. 그러자 미국은 “북이 변했다”며 북미회담 취소 통보 등 사달을 내기도 했다. 러시아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던지 외무장관을 평양으로 보내 양국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힘겨루기일수도, 또는 애가 타거나 급하다는 얘기일수도 있다. 한국전쟁휴전협정 조인 당사국이자 북과 동맹인 중국으로서는 ‘중화굴기’라는 이름의 패권국가를 추진하는 마당에, 턱 밑에서 벌어지는 급변에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수 천년 동안 한반도 연고권을 주장해왔고 휴전협정조인까지 했으니, 자신의 개입이나 간섭은 당연한 걸로 여길 터.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과 미국이 “종전선언에 굳이 중국이 참여할 필요는 없다”고 공표하고 나서니 전전긍긍할 것은 불문가지다. 이 모든 일들은 불과 대여섯 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이제는 4국이 소외든 뭐든을 느끼고 지분이건 영향력이건 주장하고파도, 예전처럼 일방통행식으로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들 있지 않은가. 열흘 전인 5월26일, 북미 정상회담 파국 위기에서 전격적 남북회담을 마친 뒤 문 대통령은 발표문에서 이렇게 천명했다. “(전략) 우리 두 정상은 6.12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한반도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를 위한 우리 여정은 결코 중단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긴밀 협력키로 했다”.
 
이른바 주변국들에게 이르고자 한다. 공동의 이익이라는 목표 아래 ‘일정 부분 같이 움직이는’ 남북한, 적어도 더 이상 적대적이지 않은 남북한이 만들어내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긴장하면서 경험하라. 새로운 질서는 이제 더 이상 주변국들 손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행동수정’을 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균형자론’과, 평화-번영이라는 한민족 공동이익은 이제 막 시동을 걸었다. 지금이야 말로 한반도가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로 서려는 역사적 순간이다. 민족적 자존감을 회복하고 동북아 새 질서 형성에 종속변수가 아니라 상수로 당당히 참여하자. 그런데 이 민족적 대명제 앞에 누가, 어느 정파가 딴지를 거는가. 6.13선거는 시장 군수만 뽑는 게 아니라는 점을 단단히 새길 일이다.
 
이강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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