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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어주는기자)상실의 ‘하루키 세계’는 삶 토닥이는 격려
장석주 시인이 풀어주는 하루키 작품들…“슬프지만 밝게 빛나는 ‘봄날 햇빛의 맛’”
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장석주 지음|달 펴냄
2018-01-24 18:00:00 2018-01-24 18: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기자]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들기 전 이 책을 먼저 읽는다면, ‘하루키 월드’에 더 진하고 깊숙이 빨려 들어 갈지도 모른다.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 실재와 판타지 두 극단을 뒤섞는 하루키 문법을 그대로 해체시켜 구석구석 살펴주기 때문이다. 소설이 집필되던 당시의 세계사적 배경과 하루키 개인의 취향까지 파고드는 데서는 30여년을 하루키에 천착해 온 저자의 윤곽을 느껴볼 수도 있다. 최근 출간된 장석주 시인의 ‘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한 작가의 거의 모든 책을 찾아 읽는 ‘전작주의 독서법’을 선호한다. 뇌의 지각 적응 능력을 한 대상에 집중해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를, 알베르 카뮈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그리고 하루키를 그렇게 읽었다. 특히 하루키의 신작이 나올 때는 서점으로 달려가 밤을 지새며 읽을 만큼 열성적이다. 등단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부터 ‘기사단장 죽이기(2017)’까지 모두 그랬다. 에세이, 인터뷰, 대담, 연구서 등으로 소설 속에 나타나는 각종 상징과 은유들의 심연을 파헤치기도 했다. 이 책은 그런 과정 속에서 공통적인 코드들을 추려 엮은 결과물이다.
 
저자에 따르면 하루키의 작중 인물은 대개 ‘외톨이’다. 학교나 회사 등 사회적 집단에서 조각처럼 떨궈져 있다. 이들은 ‘자발적인 소외’를 선택한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거나 극심한 좌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방안에 틀어 박혀 레코드를 듣거나 책을 읽고, 홀로 술잔을 비울 뿐. 저자의 말대로 “고독이라는 고치 속에서 사는 은둔자이자 주변을 맴도는 이방인”인 셈이다.
 
이런 특성은 하루키의 소설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키가 살던 시대적 정황과 맞물려 돌아간다. 초기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1970년경 ‘레종 데트르(존재의 이유)’를 잃고 맥주와 연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저자는 이를 1960년대 정부 주도의 제국주의적 대학 교육 재편에 저항하며 이념적으로 연대했던 하루키 세대가 이후 각자 도생을 모색하는 시대적 변화에 상실감을 느껴 개인화되는 면면들과 연결 짓는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하루키의 덧없이 흘러가버린 청춘에 바치는 멜랑콜리한 레퀴엠일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1960년대’에 대한 진혼의 성격이 짙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에서는 시점을 다각화하면서 외톨이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1Q84(2009)’에 이르러서는 온전한 형식의 삼인칭 구성으로 개별 외톨이들의 운명이 얽히고 설키는 총체적 세계를 그려낸다. 나약하고 선량한 사람부터 광인과 바보, 사이코 패스까지 어우러지는 복잡계는 포스터모더니즘과 물질만능주의 등 하루키가 경험해 온 사회의 집합적 총체다. 그 속에서 주인공들은 현실을 살면서도 비현실의 세계로 접속하고, 의식의 흐름 속에서도 내면의 깊은 무의식과 조응한다. 어딘지 모르게 뒤틀리고 붕괴돼가는 세계, 그 안에서 변화를 겪으며 방황하는 청춘의 아픔과 상실감, 노스탤지어가 그대로 비춰진다.
 
대체로 삶의 변두리에서 관조자적 자세를 취하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탈출구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1Q84’의 아오마메와 덴고는 ‘커다란 구멍’ 같은 결핍감을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의 사랑으로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며 이를 상쇄하려 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나’는 아내에게 이별 통고를 받으며 혼돈에 빠지지만 오래된 빨간 푸조 205를 몰고 삶의 질서와 균형을 찾기 위한 긴 여행에 나선다. 저자의 말 대로 하루키는 ‘상실과 붕괴를 겪은 사람들조차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 느낀다’라고 말하며 우리의 어깨를 툭, 두드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처럼 어딘가 낯설지 않다. 일흔 살을 앞둔 하루키를 두고 저자가 ‘젊은 작가’임을 역설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의 소설은 늘 독자들과 호흡할 수 있는 ‘동시대성’을 획득한다. 저자는 “하루키 소설 어딘가에는 ‘행복 DNA’가 숨어 있는 듯 하다”며 “어디선가 난민들은 떠돌고 테러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지만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빈번한 성 묘사로 서구의 퇴폐 풍속에 물든 작가란 평을 듣기도 하지만,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뜻밖의 윤리성이 함축돼 있다. 그 윤리성은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재미와 철학적 성찰, 동시대에 대한 유의미한 전언 속에 두루 녹아 있다. 그래서 저자는 “소설에 맛이 있다면 하루키 소설은 봄날 햇빛의 맛이다”라 평하고 “상큼하고, 아릿하고, 슬프고, 허무하고, 웃음 짓게 하는 복합적 맛”이라 구체화한다. “그의 소설엔 기쁨과 상실로 빚어진 비애, 그리고 적당량의 멜랑콜리가 버무려져 있다. 그것은 밝되 슬프게 빛난다.”
 
'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 사진/달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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