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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애국과 민주주의
2017-05-30 08:00:00 2017-05-30 08:00:00
중국에서 지난 며칠 동안 ‘애국(愛國)’이라는 말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미국 국가동물원의 팬더 이야기, 허베이성 초등학교 등교 길의 국가 게양식, 칸 영화제에서 배우 쉬다바오(徐大寶)의 오성홍기 문양 드레스 착용, 메릴랜드대학 졸업식에서의 중국 유학생의 연설에서 ‘애국’의 문제가 집중 부각됐다. 심지어 외교부 대변인도 나서서 “국민이 어떠한 사실에 대해서 태도를 표명할 때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당국의 정책에 무비판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이른바 우마오당(五毛黨)처럼 개인 SNS를 통해 ‘애국(愛國)’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특히 메릴랜드대학 졸업식 연설은 중국의 나쁜 이미지를 전파했다는 비판과 함께 해당 대학 총장이 달라이 라마를 초청했던 사실과 연관 지어 급속히 국수주의적 비판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사실 중국에서 ‘애국’이라는 말이 늘 국수주의적 틀 안에서만 갇혀 있지는 않았다. 신문화운동이나 5.4운동의 경우 ‘애국’이라는 말은 역사발전의 방향성과 관련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꽤 유용한 수사였고, 효과적이며 매력적인 가치였다. 그러나 국가건설 과정에서 ‘애국’과 국가건설 이후 ‘애국’은 그 효험에서 적잖은 차이를 보였다. 특히 신중국 건설 이후 중요한 여러 정치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애국’의 이름으로 강제된 위로부터의 군중동원이 대중의 다양한 사상과 생각을 집단적으로 배척하는 일에 동원되곤 했다. 당국에서 하는 모든 일은 ‘애국’으로 포장됐고, 그 과정에서 비판적인 의견이나 다른 의견은 ‘매국’의 틀로 묶여 대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됐다. 신중국 전반기 30년의 재앙이라는 문화혁명 또한 ‘애국’의 이름으로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애국’이 갖는 긍정적인 효과는 매우 매력적이어서 군중을 동원하고, 정책을 강제할 때 매우 유용하다. 그래서 중국 당국은 늘 ‘애국’을 통해서 정책의 수용도를 높이고 당과 국가에 대한 인민의 신뢰를 확인해왔다. 이 과정에서 당국이 벌이는 일이나 벌이고자 하는 사업은 늘 ‘애국’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애국의 길’에서 인민은 늘 동원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애국’이라는 말은 사실 당국가체제 중국에서는 ‘애당(愛黨)’과 ‘애민(愛民)’으로 등치되곤 했다. 그래서 네티즌들이 웹상에서 벌이는 여러 애국적인 활동은 ‘애국’이며 ‘애당’이고 ‘애민’으로 간주됐다. 개인의 활동을 ‘애국’적인 활동으로 치환하는 노력을 통해서 인민 개개인 모두가 애국자가 돼야 한다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심지어 이러한 활동은 SNS가 확산되면서 오프라인 공간이 아닌 온라인 공간에서도 예외 없이 수용되었다. 여기에는 국가의 추상적인 이미지를 실제 생활에서 당과 간부에 대한 충성으로 연결지으려는 고도의 거버넌스 전술이 자리잡고 있다.
 
당국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애국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노력이 국가의 이미지를 매우 잘 드러낸다는 믿음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 정치는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적극적 능동성이 지지하지 않는다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예컨대 메릴랜드 졸업식 축사 사건에서도 보듯, 애국적 이미지의 광풍이 훑고 간 자리에는 분노, 분개, 배신의 목소리와 함께 난처, 어색 불만, 맹목적 숭배에 대한 비판 등 여러 생각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발전 과정에서 온포(溫飽)나 안전 문제를 해결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여전히 많은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있고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이라는 메릴랜드대학 중국 유학생회의 비판적 목소리는 여전히 덜 주목받고 있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애국’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민주주의’ 문제와 함께 새로운 생각의 정립을 강제하고 있다. 우리도 지난 겨울을 지나면서 태극기가 ‘애국’ 이고 촛불이 ‘민주주의’라는 상호 대립적인 광장의 정치를 목도했었다. 그 결과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광장의 민심은 둘로 나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민심 통합을 위해서는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주입되는 일시적인 봉합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완벽한 이성적 통합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진통이 따른다는 점을 우리는 지난 겨울 광장에서 벌어진 행동을 통해서 경험했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이른바 ‘애국’적 현상을 보면 중국에게 ‘애국’은 아직 ‘민주주의’로 가는 길목에서 거쳐야 하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과정으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광장과 광장에서의 자유로우며 자발적인 분출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애국’의 저편에 존재하는 이른바 ‘비애국적인’ 발아 현상을 있는 그대로 봐주기에는 아직 당국가체제의 체제 제약이 너무나 강고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중국이 인민의 자발적 참여를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이른바 중국식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강제된, 위로부터 허용되는 애국적 활동에 대해서도 이제는 새로운 시각을 통한 이성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애국’이라는 국가 이미지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개인 이성의 발현을 약화시키거나 주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G2로 가는 길목에서 ‘애국’과 이른바 ‘애국적’ 현상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되새겨봐야 한다.
 
양갑용 성균관대학교 성균중국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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