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③70년대 사람들(1)문익환-"대지는 순정이기에 때로 과장된다"
입력 : 2016-01-18 06:00:00 수정 : 2016-03-17 17:35:53
겨울이 깊어간다. 1월의 절반 이상이 지났고 며칠 전 눈도 내렸다. 전방이 아니라면 아직 살을 에는 칼바람까지는 느끼지 못하는 날씨지만, 어스름한 저녁녘엔 따뜻한 어묵국물을 찾는 사람들로 포장마차가 붐비고, 오늘도 무사히―혹은 힘겹게―하루를 끝낸 샐러리맨들이 퇴근길 매운 낙지볶음 한 접시에 소주를 기울이고 싶어지는 때다. 맵고 짜고 독한 방식으로 속을 씻어내야 했던 저 1970년대의 무교동 낙지집이 파스타와 포도주에 친숙한 2016년의 젊은이들에게도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하 수상한 시절' 때문일까?
 
90년대에 그린 70년대
 
1996년과 1997년에 출판된 <만인보> 10~15권은 70년대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많은 인물들과 유신 치하에 있던 당시 사회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입안 가득히 얼얼하다 / 위장 가득히 얼얼하다 / 위장에 이르기까지 / 식도 줄기 얼얼하다 / 미워라 미워 / 고춧가루 범벅 낙지볶음 // 왜 그렇게도 밉고 매워야 했던가 // 소주 서너 병 털어넣었다 / 위장 가득히 카! 알딸딸 // 왜 그렇게도 가혹해야 했던가 // 70년대 지식인이란 / 이따위 무지막지한 자극 없이는 / 그들의 변명이 모자랐던가"('무교동 목포집', 11권).
 
고은 시인은 <만인보> 30권을 특별히 연대기 순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90년대에 70년대를 그린 것은 시기상의 이유가 있었음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90년대는 소련의 붕괴(1991)와 동서냉전의 종식, 걸프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에서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로 이어지는 미국의 패권주의가 특징적인 때였다. 한국문단에서는 '역사'의 해체가 성행하고 민중문학 분야에서도 "그 땐 그랬지" 식의 '후일담 문학'이 유행하던 시기, 시인은 70년대가 "막 없어져버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만인보>의 시인은 "70년대의 사회정서를 사람들을 통해 이끌어내"고자 '70년대의 사람들'을 90년대에 쓰기로 한다. 말하자면, 역사의식의 단절에 대한 위기감이 70년대를 다른 시기보다 먼저 그린 배경이 된 셈이다.
 
"소주 한잔에 / 통렬한 시뻘건 낙지볶음 한점 / 왜 그렇게도 독재는 끄떡없고 / 낙지볶음은 잔인하도록 행복했던가"(앞의 시)라고 묘사되는 70년대 무교동의 밤 풍경은 다음 시에서도 계속된다. "1960년대와 70년대 서울 술꾼의 행운이란 / 이렇게 맵고 / 이렇게 짠 안주에다 / 이렇게 독한 소주 열 병쯤 비워 / 통금시간 다가와 / 벌써 밤 열한시가 넘었다 // 왜 그렇게 기혹해야 했던가 // 이때쯤 모든 것이 과장된다 / 박정희조차 과장되어 / 아주 콩알만해진다 / 박정희 이 새끼 / 제 딸까지 퍼스트레이디로 써먹는 새끼 / 어쩌구 / 한마디 내지르면 / 그것이 권위가 되어 / 함께 온 친구들이 술값 낸다"('무교동의 밤', 11권)
 
무교동의 어느 밤 술 취한 고은 시인은 "이런 낙짓집 씨멘트 바닥에서 / 헌 신문지 주워 / 처음으로 분신자살한 노동자 전태일을 알"게 된다. 대한민국의 70년대는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평화시장 봉제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으로 시작해, 1979년 8월 11일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 공권력의 강제진압으로 인해 사망한 YH무역 노조원 김경숙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암울한 노동현실을 드러낸 70년대는 80년대 변혁운동이 꽃을 피울 수 있게 토양을 마련해 준 시기였고, 고은 시인이 ―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이 ―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현실을 인식하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70년대의 사람들을 그린 <만인보>의 시들은 시인과 동고동락한 인물들이 대다수 등장한다.
 
겨울 안의 '늦봄'
 
22년 전 오늘인 1994년 1월 18일은 70년대 이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선두를 섰던 문익환 목사님(1918~1994)이 별세하신 날이다. 시인이자 성서학자이고 사회운동가이자 목회자였던 그는 알려진 바와 같이 윤동주, 장준하와 친구였고,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사회운동에의 늦은 참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의 호 '늦봄'에 맞추어 그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1919~2011)는 자신의 호를 '봄길'로 지었다. 문익환 목사는 1976년 이른바 '3·1절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인해 처음 투옥된 이후 91년 6월~93년 3월의 마지막 투옥에 이르기까지, 6번의 투옥으로 11년 이상의 수감생활을 70대가 되어서도 계속해야 했다. 문익환 목사를 혈육처럼 옆에서 보아온 고은 시인은 그를 이렇게 노래한다. "70년대 이래 한반도에서 / 가장 어린 사람 / 이어서 / 80년대 이래 한반도에서 / 가장 젊은 사람 // 대지는 순정이기에 때로 과장된다 // 70년대 이래 한반도에서 / 가장 순정의 사람"('문익환', 11권).
 
1990년 '문익환 목사님의 영전에 바치는 시인 고은의 조시'. ⓒ고은재단
 
문익환 목사의 가계는 실로 '축복'받았다고 할 만한 것이어서 그의 부모인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권사도 북간도 명동촌 시절부터 민족의 독립운동과 기독교운동, 교육운동에 헌신했던 인물들이었다. 가족사가 곧 민족사이자, 사회사, 운동사, 교육사, 종교사가 되는 삶을 살아온 부모에게 두 아들(문익환·문동환 목사)이 '3·1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된 것은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는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위선이 없"고 "기교가 없"고 "삭풍 치는 북간도 벌판으로 다져서 / 사리사욕이 없"으며, "있는 것은 / 늙은 몸에 지닌 무딘 칼 / 그러나 / 그 칼이 십자가"이던 문재린 목사나('문재린', 10권), 1990년 임종시 박수로 보내달라고 한 김신묵 여사나, 그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감옥에서 가석방으로 나와, 빈소를 찾은 고은 시인과 얼싸안고 춤을 추며 어머니의 유언대로 문상객들의 박수와 웃음으로 모친을 보내드린 문익환 목사나, 참으로 고승의 내공을 능가하고 고난 속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이들이 아니겠는가.
 
1990년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빈소에서. ⓒ고은재단
 
1990년 김신묵 여사의 빈소에서 춤추는 문익환 목사와 고은 시인. ⓒ고은재단
 
<만인보>의 저자가 겪은 "순정의 사람" 문익환은 "의식이라든가 / 정신이라든가 / 이런 것이 아니었다 / 행여나 행여나 떨리는 영혼 그것 // 60세 따위 70세 따위는 나이가 아니라구 / 감옥이나 / 감옥 밖이나 너무 똑같아 / 감옥이 아니라구" 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는 아이들한테도 배우고 / 누구한테도 배워 / 온 세상을 사랑으로 채워 / 벌써 물이 넘"치는 사람이고, "군법회의에서 군검찰 꾸짖을 때도 / 그것이 노기가 아니라 / 알고 보면 넘치는 사랑이었"던 사람이다('문익환', 11권).
 
"문익화안! 문익화안 목사니임!
 
문익환 목사와 그의 영원한 반려자 박용길 장로는 "사랑 때문에 감옥이 있어야 했던가"할 만큼 "세월이 갈수록 / 산머루처럼 / 능금처럼 농익어가는 사랑"인지라, 반복되는 투옥의 긴 세월 동안 "정성스레 주고받는 편지"로 교감하며 "한 사람은 안에서 한 사람은 밖에서 싸우"게 된다('박용길', 12권). "남편 문익환에 대한 사랑"으로 "틈내어 궁체의 편지"를 쓰는 아내 박용길을 고은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반도 여인 가운데 / 이만큼 넓은 마음 있는가 / … / 세상의 찬바람에 휘날리는 빨래처럼 / 이만큼 이웃과 남에 대한 축복의 마음 있는가 / 몰라 // 수유리 집 대문 항상 열려 / 거기 가서 사랑을 배울지니라 / 조국이나 부부가 하나인 사랑 그것 // 그러나 그녀가 입은 사각 팬티는 / 누덕누덕 기운 걸레 사촌이었다 / 그렇게 사치 없이도 / 늦은 봄 늦게 핀 봄길 꽃밭이었다"(앞의 시). 남편과 함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하고 여성운동에도 참여했던 박용길 장로는 남편이 떠난 후 수유리 자택에 '통일의 집'이라는 현판을 달아 통일운동을 논의하는 이들에게 개방했다.
 
임옥상 화백의 '하나 됨을 위하여'. 문익환 목사가 남북 분단을 상징하는 철조망을 넘어서는 모습을 그린 회화작품이다. 사진/뉴시스
 
'통일'의 '꿈을 비는 마음'으로 '잠꼬대 아닌 잠꼬대'(문익환 목사님의 시 제목)를 노래하며 서거 직전까지도 '통일맞이 7000만 겨레모임 운동'을 제창했지만 그 탄생은 미처 보지 못하고 떠난 문익환 목사의 장례식 노제에서, 고은 시인은 "문익환 목사님!”을 계속해서 외치며 “우리는 이제 문익환 목사님을 가슴에 새겼습니다"라는 말로 "조시를 대신"했다. 마치 1987년 7월 9일 최루탄으로 사망한 연세대 이한열군의 영결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전태일 열사"부터 "이한열 열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열사여!"를 온몸으로 절규하며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새긴 것과 같이.
 
우리는 지난 15일 안타깝게도, 통혁당사건으로 20년(1968-1988)을 감옥에서 보낸 또 한 명의 스승, 신영복 교수를 잃었다. 별들이 져서 마음에 새겨지는 겨울이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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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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