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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의 테마여행)역사와 민족정기를 찾아 통영성곽을 걷다
2016-01-10 09:54:32 2016-01-10 09:54:32
역사를 과거의 회귀적 관점이나 퇴행적 접근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인식의 과정으로 마땅치 않다. 오직 진실의 가치를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갈 때 비로소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도록 군영을 유지해왔던 통영성곽의 흔적을 찾아 걷는다. 역사는 지워지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필요한 시기다. 민족의 정기와 잃어버린 기상을 깨우는 새해 첫 걸음을 걷는다.
 
병신년의 첫 걸음으로 외세의 침략에 맞서 300년 동안 이 땅을 지켜온 통제영의 옛 성곽을 걷는다. 일제에 의해 침탈되고 훼손되어 버린 옛 성터를 찾아가는 것은 아프고도 애석한 일이다. 통제영에 올라 강구안 앞바다를 바라본다. 어둑한 근대의 삶이 남아있는 서피랑 골목을 올라 서포루에 오르니 통영성곽의 흔적이 가늠되어진다. 북포루 아래 세병관에 올라 동피랑 언덕의 동포루, 서피랑의 서포루가 다시 통영성곽의 망루를 지키고 있다.
 
서포루에서 내려다본 통영시내와 강구안. 사진/이강
 
민족정기를 깨우러 가다
 
새해의 첫 걸음으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오래도록 군영을 유지했던 조선 삼도수군통제사영을 찾아간다. 바로 경남 통영이다. 통제영주차장 또는 병선마당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세병관을 기점으로 서포루에 서피랑 마을이라 불리는 명정동 골목을 돌아보고, 중앙시장통을 관통하여 동피랑의 동포루에 오르는 여정이다. 옛 통영성은 서포루, 동포루와 연결되어 있었다. 성곽길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통제영의 역사와 통영성의 윤곽을 더듬고, 역사와 문화를 더듬고 오래된 삶의 이야기도 엿볼 셈이다.
 
통제영은 바람 앞의 등불만 같던 민족의 수난기에 이 땅을 지켜낸 터였다. 통영의 해안선의 총길이는 617km로 유인도 41개, 무인도 109개의 총 150개의 부속도서를 지니고 있다. 말 그대로 바다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고성반도 남부와 미륵도, 한산도 등 큰 섬과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방산(650m) 등 해발고도 500∼700m 준봉의 산줄기들이 뻗어내려 바다에 몰입되어진 형세로 리아시스식 해안선이 발달되어 있는 천혜의 요새다.
 
통영성의 서쪽장대인 서포루 풍경. 사진/이강
 
때문에 1604년 통영에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영이 자리했다. 이를 줄여 부르던 이름이 통제영 또는 통영이다. 통영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부터 충무공 이순신의 기상을 담아 '충무'라 불리다가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통영시라 불려지고 있다.
 
즉 통영의 역사는 곧 통제영의 역사이고, 삶과 문화 역시 통제성곽을 한 둘레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다. 통영을 충무공 이순신의 역사관과 분리하여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통영에는 충무공 이순신 최초의 사당인 착량묘가 있으며, 충렬사, 세병관이 자리한다. 당동에 위치한 착령묘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전란이 끝나자 1599년(선조 32)에 지어진 충무공 사당의 효시다. 사당을 짓기 위해 당시 수군들과 통영의 가난한 백성들이 각자 추렴해 세운 것이다. 이후 통영사람들은 장군의 초상을 모시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도 해마다 음력 11월 19일 기신제를 올리고 있다. 예전에는 앞바다를 지나는 상선들 역시 큰 바다로 나아가기 전에는 제를 올렸다 전해진다. 1877년 이순신의 10세손인 통제사 이규석이 중수해 착량묘라 부르고 있다. 착량묘와 충무공 위패를 모신 충렬사를 잠시 둘러보고 통영성곽길의 기점인 세병관으로 오른다. 세병관에서 서문고개, 서포루, 동포루까지 돌아보는 데 2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통제영의 옛 성길을 따라 오르다
 
세병관은 옛 통영성지의 중심이자 통영성 걷기의 출발점이다. 1992년 가장 먼저 복원된 북포루 산줄기 아래 통제영이 자리한다. 통제영은 한반도의 바다를 지키는 관문으로 300여년 동안 군영을 유지해온 민족 존립의 보루였다. 그 북포루 아래 여황산의 기슭에 보물 293호인 세병관이 조선 수군의 본영다운 위엄과 풍모를 지니고 들어앉아 있다. 세병관은 조선 시대 최대의 목조 건축물로 300여년간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의 객사 역할을 했던 건물이다. 선조 36년(1603년) 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충무공의 위업을 기리는 동시에 삼도수군통제사영으로 쓰기 위해 지은 정면 9칸, 측면 6칸의 건물이다. 정면에서 마주하니 민흘림기둥이 도열한 모습이 마치 군대의 행렬처럼 늘어선 듯 보이는데, 강건하고도 당당하다. 가까이 다가가 현판을 바라본다. 가로 길이가 2미터의 크기에 세병관(洗兵館)이란 글씨체가 힘차다.
 
통제영 세병관. 사진/이강
 
신을 벗고 명당이 기운이 서려있다는 마루에 앉아 잠시 앞바다를 바라보다 서피랑으로 길을 잡는다. 통제영에서 빠져나와 산복도로 윗길로 오르면 서문고개다. 옛 통영성곽의 서쪽 문인 금숙문이 있던 언덕이다. 서피랑은 서쪽 끝에 있는 높은 비랑이란 뜻으로, 비랑은 비탈의 통영지역 사투리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소설 '김약국의 딸'의 배경이 되는 골목이다. 박경리 생가(문화동 328의 1번지)에는 현재 사람이 살고 있으나,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고갯길을 따라 오르니 예전 성곽의 일부 흔적이 남아 있고, 서피랑의 능선에 100년 만에 복원된 서포루가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다. 통제영지 내의 세병관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통영 시가지와 강구안의 모습, 항구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 3척과 조선 판옥선 1척도 보인다. 여황산의 북포루와 동피랑의 동포루, 서피랑의 서포루가 통제영을 빙 둘러 감싸고 있는 품세다. 세 곳의 포루를 이으면 군사계획도시로 조성된 통영성의 규모와 면모가 짐작되어진다. 옛 통제영의 윤곽과 현재 통영의 진경이 하나로 오버랩된다.
 
서피랑에서 중앙시장 방향으로 내려선다. 항구 쪽으로 향하면 바로 강구안이고 충무교회 앞을 지나 중앙시장통을 관통하면 동피랑으로 오를 수 있다. 중앙시장통 일대는 옛 통제영의 자취가 배어있는 곳이다. 통영성 정비사업 중 통영성지의 성곽터가 발견되는 등 그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고, 지난 해에는 이 일대에서 통영성 성곽의 기초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중앙시장을 관통해 동피랑 언덕을 올라 동포루에 선다. 새해를 맞아 통영성에 오른 것은 올바른 역사관에 대한 물음 때문이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옛 역사의 터에서 잃어버린 역사와 지워진 시공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차디찬 삭풍을 견뎌가며 나라를 지켰던 조상들의 민족정기를 되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일제침탈의 역사가 다시 논의되어지는 이즈음, 잃어버린 민족의 기상과 정기를 북돋으며 걷는 새해의 첫 걸음으로 안성맞춤이다.
 
이강 여행작가, 뉴스토마토 여행문화전문위원 gh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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