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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제3의전쟁)저유가의 역습…재정악화·디플레에 사방서 '곡소리'
배럴당 30달러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수준…공급 과잉 지속에 반등 기대 낮아
2016-01-03 10:00:00 2016-01-03 10:00:00
지난 1년 간 국제유가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2014년 상반기만해도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았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현재 4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직후와 비슷한 수준이다. 7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는 갑작스런 경기 침체로 수요가 줄어 유가가 하락했지만 지금은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원유 생산량이 증가해 가격이 떨어졌다.
 
미 셰일업계·OPEC '치킨게임'에 공급 과잉
 
전문가들은 원유 생산량 증가의 원인을 미국과 중동 산유국의 치킨 게임에서 찾고 있다. 유가가 100달러를 상회하며 고공행진을 하자 미국은 셰일혁명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 중심의 시장 질서에 도전장을 냈다. 그러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OPEC 회원국은 생산 확대로 맞불을 놨다. 가격 하향을 통해 미국 셰일가스 업체들을 도산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미국 셰일 업체들의 생산 효율이 과거보다 크게 향상된 덕에 유가 하락을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커진 것이다. 최근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70배럴에 불과했던 셰일가스 채굴기 1기당 생산량은 2015년 794배럴까지 확대됐다. 손익분기 가격은 종전의 50~70달러에서 30~40달러로 낮아졌다.
 
국제유가는 공급량 과잉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수준인 배럴당 4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추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사진은 미국 캔자스주의 한 유전에서 석유 시추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AP
 
그럼에도 양측은 가격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공급 과잉 국면은 쉽사리 전환되지 않을 전망이며 가격 반등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달 4일 열린 OPEC 정례회의에서 회원국들은 감산 합의에 실패하며 자율 조정 능력을 상실했다.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등 재정 위기에 직면한 일부 OPEC 회원국들이 감산을 요구했고 사우디가 가이드라인이라도 설정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산유량 한도 조차 설정하지 못했다. 여기에 원유 매장량 세계 4위인 이란이 핵협상 타결로 경제 제재가 해제돼 공급 과잉에 가세할 전망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이란의 원유 공급량은 하루 평균 50만배럴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이 40년만에 원유 수출 금지 규제를 폐기키로 한 점도 유가 수급에는 부정적이다.
 
IMF,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금융기관이 바라보는 유가 향방은 비관적이다. 공급 과잉에 대한 우려가 시장에 충분히 반영돼 있는 상황이지만 유가가 지금보다 5~15달러 정도 추가로 하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인한 달러 강세 지속으로 원자재에 대한 투자 매력이 떨어지고 있는 점과 세계 최대 원유 소비국인 중국의 수요가 예년만 못하다는 점도 유가의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요인이다. 시장에서는 올해 말까지 큰 폭의 가격 변동은 없을 것이며 반등이 나타나더라도 배럴당 50달러 전후에 그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에 저유가 수혜 없어
 
가파른 유가 하락은 세계 경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과거에는 유가 하락으로 수출 제조업에 의지하는 비산유국은 호황기를 누렸지만, 글로벌 경기가 전반적으로 위축돼 있는 지금은 악순환의 고리가 될 뿐이다.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곳은 산유국들이다. OPEC 회원국들은 대부분 재정 수입의 80~99%를 석유 판매에 의존하고 있는데, 저유가가 장기간 지속됨에 따라 재정 부담이 심화됐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산유국들이 균형 예산을 이룰 수 있는 국제유가의 마지노선은 사우디가 106달러, 이라크 81달러, 베네수엘라 125달러 등이다. 실제로 베네수엘라의 경우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지난 9월 역대 최고치인 6458.8베이시스포인트(bp)까지 올랐고,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는 사상 첫 해외 채권 발행을 검토하기도 했다.
 
산유국의 위기는 비산유국으로 전염될 조짐을 보인다. 저유가로 인한 디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경기 부진의 여파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유로존은 물가상승률이 제로에 가깝고 성장 속도가 급격히 둔화된 중국도 정부 목표치에 한참 못 미치는 1%대 물가에 머물러 있다. 경제 상황이 그나마 난 곳으로 분류되는 미국 역시 1%대의 낮은 물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금융시장도 저유가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방대한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증시 등 세계 각국 자산에 투자했던 중동 산유국들이 투자금을 회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즈(FT)에 따르면 지난 3분기 중동 국부펀드들이 자산운용사에서 거둬들인 자금은 최소 190억달러(약 22조원)다. 6720억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는 세계 4위 국부펀드 사우디통화청(SAMA)은 올해에만 700억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회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각에서는 저유가의 후폭풍이 금융기관에까지 미칠 것을 염려하고 있다. 석유기업이나 석유 투자·거래 사업과 관계된 회사에 대출은 내준 은행은 유가와 한 배를 탄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유가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은행일 수록 내년도 스트레스테스트 결과에 촉각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김진양 기자 jinyangkim@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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