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후 이틀이 지난 23일 오후 4시 현재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조의 표명이나 조전 발송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 보도도 나오지 않았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오전 정례브리핑에서 “서거와 관련한 북측의 동향과 움직임은 없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김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북한에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고 1994년 김일성 북한 주석 사망 후에는 사실상 북한붕괴론에 입각한 정책을 펴면서 북한의 감정이 좋지 않은 탓에 조의 표명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오락가락한 횟수에 관한 통계가 나왔을 정도로 냉탕(강경)과 온탕(온건)을 오갔다. 1989년 국제냉전 종식과 전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인해 한반도 분단 극복의 가능성이 열린 중요한 시기였지만 김영삼 정부는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1993년 2월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는 획기적인 발언을 한 김 대통령은 그러나 그해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1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자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대와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한반도 전쟁 위기가 커지자 김 대통령은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북한 핵시설 폭격을 적극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위기 상황은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과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계기로 해소됐지만, 다음달인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급랭했다.
김일성 사망 직후 전군에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한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사망에 대한 어떤 형식의 조의 표현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간주해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경고했다. 나아가 김 대통령은 김일성이 없는 북한은 급속히 붕괴될 것이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사실상 끊어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북·미 핵협상은 진척되어 그해 10월 ‘제네바 합의’가 타결되자 김 대통령은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을 공개 비판했다. 남한의 태도가 이렇다 보니 북한은 남한과의 대화는 닫고 미국하고만 소통하는 이른바 ‘통미봉남’ 태도를 보였다. 일본까지 북한과 대화를 추진하자 한국은 동북아 외교의 외톨이가 됐다.
이를 만회하고자 김영삼 정부는 1995년 5월 대북 쌀 지원을 발표했으나 인공기 게양 강요 사건, 청진항 억류 사건 등이 발생해 원하던 정책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1997년 황장엽 망명 등이 이어지면서 남북관계는 최악이 됐고, 김 대통령은 1998년 2월 퇴임했다.
앞서 북한은 2009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 명의의 조전을 보낸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때는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으로 구성된 조의 방문단을 남측에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2011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때의 경우 정부는 조전을 발송하거나 정부 차원의 조문단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류우익 통일부 장관이 특별담화를 통해 “북한 주민에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유족들의 조의 방북을 허용했다. 민간단체의 조전 발송도 허용했다.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
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남북관계가 정체되어 1990년대 중반 한반도 냉전·분단 극복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1997년 북한 황장엽 비서의 망명은 악화된 남북관계에 쐐기를 박는 일이었다. 사진은 지난 2007년 김 전 대통령과 황 전 비서가 한 행사에 나란히 참석한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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