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한 문제 피하고 감추고…갈 곳 잃은 한국 외교
정상회담·장관회담 대화, 상대국 언론보도로 확인되는 경우 잇따라
남중국해·위안부·자위대 등 대화한 사실도 은폐해 비판 자초
2015-11-08 09:50:24 2015-11-08 09:50:24
다른 나라와의 정상회담이나 외교·안보에 관한 고위급회담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 상대국 정부나 언론에 의해 뒤늦게 공개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 측이 외교·안보적 파장을 지나치게 고려해 민감한 내용을 숨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땅히 공개해야 할 국가적 중대 사안을 은폐하는 비민주적인 태도이자, 해당 이슈와 관련된 주변국들에게 한국의 고민과 허점이 무엇인지를 알려줌으로써 외교력을 갉아먹는 행위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의 은폐 사례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이슈는 최근 미국과 중국이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는 남중국해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2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으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중국의 인공섬 12해리 내에 미국 구축함이 진입한 것은 국제법에 부합해 (일본은) 즉각 지지를 표명했다”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바다를 지키기 위해 한국이나 미국과 연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베의 이 발언은 정상회담 후 김규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브리핑에는 나오지 않았다가 이날 저녁 일본 교도통신의 보도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그 보도가 나온 후에야 아베 총리가 남중국해 문제를 언급했으며 박 대통령은 정부의 기존 입장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16일 한·미 정상회담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박 대통령과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중국이 국제규범과 법을 준수하는 면에서 실패하면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사흘 후 국회에서 의원들이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이 남중국해와 관련된 것이냐’고 묻자 “남중국해의 ‘남’자도 나오지 않았다. 일부 언론이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부인했다. 그러던 윤 장관은 그로부터 이틀 후 열린 한 콘퍼런스 연설에서 “지난주 방미시 오바마 대통령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남중국해의 ‘남’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자신의 말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어서 언론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남중국해 문제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자기네 편에 설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논의한 사실 자체를 숨기는 식으로 극도의 소극성을 보인다면 오히려 한국의 외교적 약점을 노출시킬 뿐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예컨대 한국이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용인하는 대가로 미국이나 일본 혹은 중국이 다른 외교 사안에서의 양보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31일 한·중 정상회담 때 리커창 중국 총리가 이어도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도 정부가 공개하지 않아 비판을 자초했다. 리 총리는 박 대통령에게 "중·한 해양경계획정 회담을 조속히 정식으로 재개하자"고 제안했다. 한·중이 중첩되는 배타적경제수역(EEZ)의 경계를 획정하는 협상을 빨리 하자는 뜻으로, 이어도 관할권 문제가 포함된다. 청와대나 외교부가 공개하지 않았던 리 총리의 이 발언은 회담 이틀 후 중국 외교부가 홈페이지에 회담 결과를 공개하면서 결국 알려졌다.
 
지난달 20일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나온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의 발언을 한국 국방부가 은폐한 일도 있었다. 국방부 당국자는 당시 한민구 장관이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도 우리 영토"라며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가 북한에 들어갈 때도 한국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자 나카타니 방위상이 "한·미·일이 긴밀히 협력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다음 날 일본 언론은 나카타니 방위상이 "대한민국의 유효한 지배가 미치는 범위는 휴전선의 남쪽이라는 일부의 지적도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국방부는 그 발언이 있었음을 확인했고, 중요한 문제를 숨겼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밖에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가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산케이신문 기자 재판 문제를 제기한 사실도 청와대는 밝히지 않았다. 이는 회담 후 이 문제에 대한 일본 기자들의 질문에 아베 총리가 “다양한 과제에 대해 현안이 있다. 일본으로서는 말할 것은 확실하게 말하면서 한국측의 대응을 요구했다"고 답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확인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김규현 외교안보수석은 “조기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했다”며 연내 타결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이후 일본 언론들에 의해 전해진 아베 총리의 발언은 연내 타결 가능성이 높지 않음을 시사했다.
 
이처럼 국가전략상 중요한 사안에 대한 입장 공개를 회피하기만 하고 쟁점을 숨긴다면 ‘힘 센’ 나라들의 뜻에 휩쓸리는 쪽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자위대 문제에서 미국이 사실상 일본 편을 든 것과 같은 일이 다른 이슈에서도 나타날 것이라는 지적이다.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은 2일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자위대의 한반도 진입과 관련해 ‘국제법상 주권 존중’을 강조함으로써 북한의 국제법적 실체를 인정하는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는 해석이 나왔다.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 
 
청와대는 한·일 정상회담에서 남중국해 문제 등 민감한 사안들이 거론된 사실을 공개하지 않다가 일본 언론들이 보도한 뒤에야 일부를 확인해 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지난 2일 청와대에서 확대 정상회담을 하는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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