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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한국 재벌, 파란만장한 30여년 변천사…97년 외환위기로 격변
현대, 삼성에 재계 왕좌 내줘…중후장대 몰락과 신재벌의 등장
2015-11-04 07:00:00 2015-11-04 07:00:00

대한민국 재벌사가 공식적으로 쓰인 것은 28년 전인 1987년. 공교롭게도 지금의 헌법체계를 만든 6월 민주항쟁이 있던 해다. 당시 경제기획원 산하 공정거래위원회는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을 막겠다는 취지로 공정거래법을 개정, 자산총액 4000억원 이상 대규모 기업집단을 선정했다. 현대를 시작으로 대우·삼성·럭키금성·쌍용 등 32개 기업집단이 이름을 올렸다. 30대 재벌의 출발이다. 지금은 성장한 경제규모만큼이나 기준도 대폭 상향됐다. 자산총액 5조원 이상 기업집단이 61곳(공기업 포함·2015.4월 기준)에 달한다. 재벌사 30년 동안 바뀐 것은 또 있다. 대우·쌍용·기아·동아 등 쟁쟁하던 그룹들이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쓰러졌다. 현대는 왕자의 난 끝에 그룹이 분리되면서 재계 1위 자리를 삼성에 내줬다. 대변혁이었다. 반면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28년 전 공정거래법 개정의 취지였던 재벌의 경제력 독점은 오히려 심화돼 경제민주화 바람을 낳았다. 또 현대를 갈라놨던 혈족 간 경영권 분쟁은 16년이 지난 2015년 롯데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반면교사의 교훈을 잊은 대가는 참혹했다. <뉴스토마토>가 28년의 시간을 거슬러 30대 재벌의 변천사를 살펴본 이유다. (편집자)

 

올해 역시 재계 서열 1위는 삼성이다. 삼성은 삼성전자 등 비금융·보험 계열사 53곳과 삼성생명, 삼성카드 등 금융·보험 계열사 14곳을 거느린 초대형 기업집단이다. 삼성과 함께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포스코, GS, 현대중공업, 한진, 한화 순으로 10대 기업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어 KT부터 두산, 신세계, CJ, LS, 대우조선해양, 금호아시아나, 대림, 부영, 동부가 20대 기업집단에 이름을 올린다. 현대, 현대백화점, OCI, 효성, 대우건설, S-Oil, 영풍, KCC, 미래에셋, 그리고 동국제강을 끝으로 30대 기업집단의 범주가 마무리된다. 이를 일반적으로 '30대 재벌'로 통칭한다. 

 

대한민국 경제를 상징하는 30대 기업집단의 등장은 6월 민주항쟁이 있던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가 공정거래법을 개정, 자산 총액 4000억원 이상 그룹을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선정하면서, 30대 기업집단이 처음으로 규정됐다. 1987년 기준 재계 1위는 현대그룹(계열사 32곳, 자산 8조380억원)으로, 현대는 대우(29곳, 7조8750억원)와 삼성(계열사 36곳, 5조8880억원), 럭키금성(57곳, 5조5080억원) 등을 압도했다.

 

경제성장의 키를 쥔 정부가 80년대 말까지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기계업 육성에 주력하는 동시에, 높은 경제성장률로 인한 아파트 붐, 해외건설 수주 등에 힘입어 재계 30위권에는 중화학·기계·건설업 기업집단이 다수 등장했다.

 

1987년 현대, 대우, 삼성, 럭키금성(LG), 쌍용이 재계 빅5를 형성한 후 정확히 10년 뒤인 1997년 외환위기(IMF) 직전까지 고려합섬, 극동건설, 극동정유, 금호, 기아, 동부, 동국제강, 동아건설, 동양, 두산, 대림, 롯데, 미원, 범양상선, 벽산, 우성건설, 삼환기업, 선경(SK), 한국화약(한화), 한라, 한보, 한양, 한진, 해태, 효성 등이 30대 기업집단의 주요 멤버였다.

 

재계에 지각 변동이 생긴 것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다. 중후장대 산업에 종사하며 은행 돈으로 문어발 확장에 집중하던 재벌들은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힘없이 쓰러졌다. 당시 재계 30위권 중 대우(4위), 쌍용(5위), 기아(8위), 동아(13위), 진로(19위), 고합(21위), 해태(24위), 아남(26위), 한일(27위), 거평(28위) 등이 차례로 무너졌다. 대마불사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기업집단은 외환위기 주범으로 몰렸고, 정부 주도 하에 대대적인 개혁정책과 기업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외환위기 후 10년이 지나 재계 30위권에서 자리를 지킨 곳은 삼성과 SK, LG, 롯데, 금호아시아나, 한진, 한화, 두산, 동국제강, 동부, 대림, 코오롱 등 12곳에 그쳤을 정도로 후폭풍이 거셌다.
 
1987년부터 14년간 부동의 재계 1위였던 현대는 왕자의 난으로 일컬어지는 경영권 분쟁 속에 2001년 현대건설이 부도나면서 그룹이 산산조각났다. 현대가 물러난 자리는 '이건희의' 삼성이 가져갔다. 삼성은 올해까지 15년째 재계 1위로, 대한민국 재벌의 상징이 됐다.
 
이른바 2군 재벌 또는 신재벌의 등장으로 인한 세대 교체도 이뤄졌다. 민영화된 포스코(2000년)와 KT(2002년)는 단숨에 7위, 5위로 올라섰다. 외환위기 이전까지 10위권을 턱걸이하던 롯데는 유통업으로 끌어모은 자금으로 두산주류BG, 파스퇴르유업, 동양카드, 대한화재 등을 차례로 인수, 2005년부터 재계 5위에 이름을 올렸다.
 
금호아시아나의 흥망성쇠도 눈에 띈다. 금호아시아나는 대한통운(2008년)과 대우건설(2009년) 인수에 성공하며 사세를 급격히 확장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물류·운송 분야 라이벌인 한진을 제치고 재계 9위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다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승자의 저주를 남겼다.
 
삼성에서 분가한 신세계와 CJ, LG에서 분리된 GS와 LS, 현대라는 뿌리를 둔 현대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KCC 등은 전통 명문가의 힘을 여지없이 보여준 사례다. OCI는 태양광의 힘을 바탕으로 옛 영광(동양화학) 되찾기에 성공했고, 건설기업에서 출발한 부영, 영풍문고와 고려아연을 보유한 영풍, 금융·보험 계열사를 주력으로 급성장한 미래에셋 등도 30위권에 새로 등장한 신진 재벌로 분류된다.  
 
STX는 신재벌 중 가장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우의 전철을 재연하며 무너졌다. STX는 2001년 쌍용중공업을 모태로 창립, 대동조선과 범양상선 등을 차례로 사들이며 2013년 재계 13위까지 고속성장했다. 하지만 무리한 인수합병은 조선업황의 침체 속에 유동성 위기로 이어졌으며, 급기야 2014년 공중분해되는 비극의 기업사를 써야 했다.
 
2015년 4월 기준 30대 대규모 기업집단들은 경기침체를 비웃기라도 하듯 매년 자산을 불려가고 있다. 2014년 회계기준으로 30대 기업집단의 평균 자산은 50조3500억원을 기록, 1987년 이후 연평균 88.5%의 증가율을 보였다. 매출은 연평균 61.4% 늘었다. 이 기간 명목 국내총생산(명목 GDP) 연평균 증가율(39.2%)과 비교하면 괄목할만하다.
 
또 IMF 이전까지 재계 1위 현대를 축으로 대우와 삼성, SK, LG, 쌍용, 한진, 한화, 대림, 롯데, 기아 등 상위권 기업집단들이 엎치락뒤치락했던 양상은 2000년대 중반부터는 아예 사라졌다. 2006년부터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포스코, GS, 현대중공업, 한진, 한화의 10대 기업집단 양상이 구축됐다. 부의 집중, 재벌 독주 시대 고착이다.
 
◇1987년 이후 10대 기업집단 순위 변동 추이. 자료/공정거래위원회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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