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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의 권력을 위해 예술을 모욕하지 말라"
2015-09-22 17:37:34 2015-09-22 17:37:34
최근 문화예술에 대한 정치 검열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22일 원로, 중견 예술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파행적 사업 운영과 정치 검열에 대해 항의했다.
 
이날 오후 동숭동 예술가의집 앞에서는 문화연대와 서울연극협회, 한국작가회의 공동주최로 '한국문화예술을 염려하는 원로예술인들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김나볏 기자)
 
이번 회견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순수예술 창작 지원에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배제하거나 이미 선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포기하도록 특정 작가에게 권유한 사실에 대해 항의하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이달 초 이같은 내용이 언론매체와 국감 등을 통해 불거져 나오면서 그간 각 문화예술 단체들은 장르 단위별로 문화예술 검열에 대한 반대의 뜻을 속속 밝혀왔다. 단체들은 이번 회견을 기점으로 연대를 강화하며 목소리를 높여나간다는 방침이다.
 
이날 회견에서 이들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문화예술 지원의 과정과 결과 공개 및 의혹 해명 ▲파행적 사업 운영의 책임자 문책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문화체육부 장관에게 ▲그간의 의혹과 논란에 대한 책임 표명 및 사과를 요구했다. 또 정부에는 ▲문화예술 행정의 독립성 보장 및 공공운영의 원칙 천명과 실천을 요구했다.
 
회견에 참가한 한 관계자는 "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면서 "예술의 자유를 위한 공개적인 토론이나 포럼 등 다른 행동들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완전히 합의되지는 않았지만 각 단위 협회별로 꾸준히 퍼포먼스를 이어갈 생각"이라며 "일회성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장기전으로 생각하고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며 문체부나 문예위의 태도가 달라질 때까지 꾸준히 항의하기 위해 의견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현재 드러난 것만 이 정도이지 미술계든 음악계든 간에 예술계 전체가 다 해당되는 사안인데 힘을 못 모으고 있다"면서 다른 예술 단위들과도 앞으로 함께 힘을 합치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다음은 이날 발표된 '한국문화예술을 염려하는 원로예술인들 기자회견문' 전문.
 
<한줌의 권력을 위해 예술을 모욕하지 말라>
 
한 나라의 문화행정은 그 나라, 문화예술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따라서 문화예술행정을 책임지는 국가기관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그런데 이번 2015년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사업 운영은 어떠한가. 공공기관으로서의 공공성도 예술행정 담당기관으로서의 소신과 철학도 전혀 갖추지 못했다. 문화예술 행정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의 수준이 겨우 이 정도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저 참담하기만 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예고된 일정과 지원 규모를 원칙도 없이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심사과정과 그 결과마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다. 엄정한 심사와 공정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이뤄져야 할 공공지원이 밀실의 야합처럼 처리되고 발표된 것이다. 정치적 외압에 따라 좌충우돌하며 무리하게 심의결과를 조정했다는 의혹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공기관으로서의 신뢰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창작산실 지원의 박근형, 문예창작기금의 이윤택, 다원창작예술지원 분야의 ‘안산 순례길’이 정치적 이유로 심사에서 배제되었다는 심사위원의 증언이 나왔다. 우리는 들통난 게 세 작품일 뿐 예술지원 과정 전체에 정치적 검열이 작용했다고 본다. 현 대통령과 그 부친인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언급, 대선 당시 반대편 후보 지지 연설, 심지어 세월호를 언급했다는 것이 이유가 되었다고 하니 그 시대착오성과 후진성에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더욱이 사회적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개입이 아니라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라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해명은 문화예술 행정 담당기관으로서의 책무와 역할을 의심하게 만든다. 문화예술의 가치는 사회적 논란 위에서 비로소 꽃 피는 것이 아닌가. 통념과는 다른 발견, 지배적 논리를 거스르는 비판적 인식, 안일한 쾌락을 뒤흔드는 불쾌한 위반을 통해 우리는 현실을 예민하게 바라보고 가치의 방향성을 경험하며 바른 미래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된다. 표현의 자유가 예술의 절대적 조건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화예술 행정 담당 기관으로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할 일은 사회적 논란을 미리 예단하고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논란이 최대한 표현되고 충돌하면서 공감적 토론의 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지원하되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이러한 예술 지원의 소임을 적시한 표현 아닌가.
 
다른 입장과 의견을 용인하지 않고 예술적 풍자도 우의도 이해하지 못하고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하려는 예술을 차단하는 기관이 예술행정을 주관하고 있는 상황은 심히 우려스럽다. 정치적 외압의 심의와 지원의 원칙을 바로 헌납하는 공공기관이 어떻게 예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켜내고 공공지원의 가치를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예술의 자유가 인간의 자유로 이어진다는 믿음으로 오랫동안 예술 창작의 길을 지켜왔다.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는 우리의 고통이자 희열이었다. 문화예술에 대한 부당한 외압과 소신 없는 문화예술 행정에 반대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하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예술 지원의 과정과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의혹을 해명하라.
 
하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파행적 사업 운영의 책임자를 문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
 
하나. 문화행정의 수장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그간의 의혹과 논란에 대해 책임지고 사과하라.
 
하나. 정부는 문화예술 행정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공공운영의 원칙을 천명하고 실천하라.
 
-2015년 9월22일 문화연대, 서울연극협회, 한국작가회의를 비롯한 예술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연극인들 일동-
 
김나볏 기자 freenb@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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