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양극화'라는 부작용도 만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공유가치창출(CSV)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 기업들의 CSR·CSV 활동은 마케팅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와 지난해 있었던 세월호 참사 모두 기업 또는 정부가 사회적 책임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지적이다.
국내 CSR 분야의 권위자로 꼽히는 안병훈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명예교수는 기업의 CSR이 마케팅 차원의 활동이 아닌 경영의 기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 명예교수는 "국내 기업들의 CSR 활동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사회공헌도 중요하고 착한 기업이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자신들의 사업활동으로 인해 야기되는 부정적인 부분에 대한 책임감과 자정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안병훈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명예교수. 사진/뉴스토마토
◇'착한기업(CSV)'보다 '바른기업(CSR)'이 먼저
안 명예교수는 먼저 CSR과 CSV의 차이점부터 짚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CSR은 기업의 책임부분을 다루는 전략분야고 CSV는 책임여부보다는 기업이 이윤창출을 하면서도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운영하는 적극적 개념"으로 "CSR은 바른 기업, CSV는 착한 기업이라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최근에 CSV 측면의 사회공헌 활동이 보다 강조되고 있는 점에는 아쉬움을 표했다. 책임부터 다 한 뒤에 사회공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임이 중요한 이유는 '명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장기적으로는 주주가치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안 명예교수는 "책임부분에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명성이나 경쟁력이 하루아침에 떨어질 수 있다"며 "인터넷사회에서는 명성 하락을 방어하는 것이 높이려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행위"라고 설명했다.
지난해말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이나 최근 대형병원에서 일어난 메르스 방역 실패 사태 등은 모두 책임을 다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SNS를 타고 사건이 일파만파 퍼지며 기업가치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결국 CSR은 기업가치의 이슈다. 안 교수는 "CSR 시스템을 잘 갖춘 기업은 투자자와 자본시장 입장에서 볼 때 리스크가 적은 투자처가 된다"며 "장기적인 관점이나 펀더멘털 개념에서 볼 때 CSR을 못하는 기업은 어디선가 사고가 터지게 돼 있다"고 말했다.
문제가 발생한 이후의 사후적 책임 뿐만 아니라 문제 발생을 차단하는 사전적 책임 개념의 CSR을 기본적인 경영철학에 반영하고 그 이후 사회적가치를 통해 돈을 버는 CSV를 추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짧은 경영주기·단기투자자가 CSR의 '걸림돌'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 시장에서는 기업의 CSR을 바탕으로 한 투자는 활발하지 않다. 기업경영의 '시간의 축'이 점점 짧아지기 때문이다.
안 명예교수는 "대기업의 경우 오너는 유지되더라도 사장은 3~4년, 실무진은 1~2년만에 갈아치우는 경향이 있다"며 "길어야 2~3년을 볼 수 밖에 없는 구조로 CSR이 들어설 가치가 없다"고 지적했다.
금융위기 이후로 중·장기투자자보다는 단기투자자가 늘고 있는 점도 기업의 CSR의 성장을 막는 주요 요인이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힘든 CSR 투자의 특성상 단기투자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업이 CSR 투자를 확대할 경우 단기투자자들이 경영권 남용 이슈를 들고 나올 수도 있다.
안 명예교수는 "최근에는 큰 돈이 들어가는 기부나 사회적 활동을 하려면 이사회 결의를 받아야해 이전처럼 기업들이 큰 금액을 내놓기 어려워 졌다"며 "이해관계가 다양한 투자자 중 어디에 주안점을 놓고 보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이같은 지배구조상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연기금의 역할 강화가 제시됐다. 그는 "외국의 사례를 보면 중장기 가치투자를 추구하는 연기금이 기업의 사회가치경영 확산에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기금 이외의 다양한 기관투자자들도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CSR 활동을 요구하고 경영간섭이 아닌 주주권 행사차원에서 관련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궁극적으로는 장기투자자와 단기투자자의 의결권에 차등을 둬 단기차익을 노린 투자자들이 장기적인 경영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기업도 돈 벌 수 있다"…개념 넓혀야
CSR이나 CSV가 포함하는 개념의 범주를 넓힐 필요성도 제시됐다.
안 명예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취약계층을 돕는 일을 해야만 '사회적'이라고 본다"며 "만약 개인정보유출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솔루션을 개발했다면, 메르스 백신을 개발했다면 이는 사회적 가치가 아닌 것이 되냐"고 반문했다.
현행 규정상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해당 기업은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 및 사회적 서비스 제공, 지역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해야한다. 그 이외의 부분은 새로운 시장으로 보고 있다.
안 명예교수는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해 정부의 정책적 노력을 많이 절감시켰어도 시장에서만 알아서 돈을 벌으라고 한다면 비용 때문에 사회에 크게 확산될수 없다"며 "이런 부분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회적기업이 영리를 추구하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분위기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사회적기업이 시장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 영리기업으로 발전한다면 오히려 사회적 가치 창출에 연속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IT공룡 구글을 꼽았다. 구글은 지난 2004년 나스닥시장에 상장할 때 "우리는 돈벌이만 앞장세우지 않겠다. 전세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가공·제공해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는 내용의 기업공개(IPO) 레터를 투자자들에게 보낸 바 있다.
자신들의 기업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투자자만 받겠다는 뜻으로 단기투자자는 정중히 거절하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단기투자자들이 경영철학에 제동을 거는 것을 막기 위해 보통주와 특별주의 의결권에 10배의 차이를 두기도 했다.
◇규제보다는 자발적 공시로 CSR 강화
프랑스나 인도 등에서 CSR을 법제화 하듯이 정부가 CSR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없겠냐는 질문에 안 명예교수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CSR는 법적인 의무를 넘어서는 자발적이고 자정적인 분야"라며 "규제가 필요하다면 세부적이고 직접적인 규제보다는 시장에 '준자발적인 공시'를 이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시를 엄격하게 제도화하고 세부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에도 경계감을 표했다.
환경, 지역사회, 인권, 안전 등 CSR의 범위가 광범위해 기업의 위반 내용을 찾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또 인권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는 밖에서 봤을 때 쉽게 내용을 알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자칫 느슨하게 법제화를 하면 기업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대안으로는 홍콩식의 공시제도를 제시했다. 홍콩거래소는 상장기업에 대해 CSR 관련 공시를 보고하거나 보고하지 못할 경우 그 사유를 밝히도록 하는 '보고 및 설명(Report or Explain)' 제도를 운영중이다. 공시 내용도 세부화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서술토록 하고 있다.
안 명예교수는 "연성규제지만 투자자들이 공시를 통해 평가할 수 있는 만큼 직접규제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며 "우리나라도 비슷한 수준으로 하거나 잘 하는 부분을 지원하는 식으로 해야한다"고 제언했다.
원수경 기자 sugyu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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