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세대도 예술 작품을 볼 수 있게
세계시민
2015-04-30 09:31:00 2015-04-30 10:46:34
신윤복의 ‘미인도’를 가까이 본 적 있다. 미추를 가름하는 심미안이 내겐 없어서 구체적으로 따질 순 없었으나, 이 나라에도 모나리자만큼 훌륭한 그림이 남았다는 느낌이 좋았다. 미인도와 더불어 많은 예술 작품을, 목숨과 전 재산을 걸고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께 감사하다. 그 선생처럼, 위대한 예술 작품의 보존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요즘도 있다. 미국 일간지 『The New York Times』가 지난 4월 16일에 한 사람을 보도했다.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그의 삶 오랫동안, 파리 14구의 비좁고 갑갑하고 어질러진 아틀리에에서 지내며 작업을 했다. 그곳은 겉이 페인트로 얼룩진 흉상과 작은 입상으로 가득했고, 벽은 스케치 및 낙서투성이였다. 그 예술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밤낮으로 작업을 했으며, 머리칼에 묻은 회반죽을 닦지도 않은 채 식사를 하며 잠깐 쉬었다.
 
포토 저널리스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알베르토 자코메티. 사진/바람아시아
 
그가 ‘새 자코메티 협회’의 일부로서 남겨둠에 따라, 270제곱피트의 스튜디오는 연구 센터와 전시 공간으로, 정확하게 그 지역에 재창조될 것이라고 자코메티 재단의 Catherine Grenier 이사가 말했다. 그 공간은 재단의 전초기지로서, 자코메티의 유산 대부분을 관리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자코메티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다.
 
2003년도 창립 후 이 재단은, 경쟁 단체 및 자코메티 일가와 그 예술가를 대변할 권리 및 그의 유작(몇몇 작품은 경매에서 100만 달러 넘게 호가됐다)을 맡을 권리를 둘러싼 논쟁에 휩싸였다. 이제, 퐁피두센터의 공식 대표 이사 Grenier 씨는 그 재단을 열어서 더욱 평화로운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작년에 내가 여기에 왔을 때, 이 재단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대중에게 닫힌 상태. 내 최우선 목표는 이 활동과 뛰어난 컬렉션을 접근 가능케 만드는 것이다.”
 
다른 야망도 있다. 재단은 자코메티의 카탈로그를 출판하고, 250여 개의 조각상, 90여 개의 그림, 수천 개의 드로잉과 사진으로써 세계적 규모의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Grenier 씨는 2017년에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 것이라 밝혔다. (테이트는 그 전시회를 승인했으나 그해에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지난 수십 년간 자코메티의 유산을 둘러싼 소란이 있었다. 그 유산을 대변하겠다는 개인들 및 단체들 사이 싸움이, 유산에 함부로 가격을 매기고 자코메티의 작품에 대한 연구를 좌절시키면서, 법정 안팎에 일어났는데, 그와 동시에 작품들의 가격이 치솟았다. 20세기 최고의 조각품이라고 하는, 그의 1950년 작품 ‘Chariot(마차)’는 지난 해 11월의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 천만 달러에 팔렸다. 그리고 1960년 작품 ‘Walking Man I(걸어가는 남자 I)’는 2010년 경매에서 1억 4천만 달러에 팔렸다. 그 기록에 도전하는 클리스티 경매사는, 1947년 작품 ‘Man Pointing(포인팅 맨)’을 오는 5월 경매에 내놓을 것이라고 지난 주 밝혔다. 그 작품은 1억 3천만 달러에 팔릴 것으로 예상된다.
 
 
Chariot(마차)
 
 
 Man Pointing(포인팅 맨)
 
자코메티는 64세에 죽으며 유언 한 줄은커녕 증여 계획도 남기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미망인 Annete 씨로 하여금 그의 유산을 맡아 보게끔 했다. 자코메티 부부의 친구이자 사진가 Sabine Weiss 씨는, 자코메티가 죽자 그의 부인이 저더러 “모든 것”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했다며, “파리의 수집가들의 고향인 이 아틀리에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의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스위스와 스페인의 박물관 및 컬렉션에 있는 자코메티의 작품도 찍었다.
 
Annette 씨는 Odéon 극장 근처 레프트 은행 본사를 공식적으로 구매하고자, 정부의 허가를 기다리면서 제 소유의 재산을 어느 재단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일들이 쌓여가고 있었고, Annete 씨는 조만간 하나의 협회를 출범시키자고 말했다”고 Weiss 씨는 밝혔다. Weiss 씨는 후에 이 협회의 책임자가 되지만 현재는 이와 관련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예술 재단 설립은 협회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데, 문화부와 내무부의 허가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2003년에 자코메티 재단이 설립됐을 때 – Annete 씨가 죽은 지 십년 후 – 그 재단은 Annete 씨의 공식 비서 Mary 씨에 의해 운영되는 그 협회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재단과 협회는 평행선을 달리다 법정에서 다투기에 이르렀다. 2013년, 당시 재단의 이사 Véronique Wiesinger 씨는 자코메티의 작품 섭외에 있어, 여타의 자코메티 유산의 다른 대리인들(스위스의 자코메티 일가 등)의 사전 허가가 필요 없는 권리를 얻으려고 건 여러 소송에서 졌다.
 
오늘날 재단은 그 방향을 바꾸고 있는데, Grenier 씨와 2011년에 새로 선임 된 이사장 Olivier 씨 덕분이다. Mary 씨의 그 협회는 와해됐는데, 이는 레프트 은행 부동산으로 그 재단이 옮겨갈 수 있도록 했으며 거의 모든 소송들(자코메티 모조품과 관련한 경우 제외)이 금지됐다.
 
테이트 모던 전시회와 더불어, 올해는 자코메티의 초상화 전시가 국립 초상화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듬해 자코메티 50주기 때는, 피카소 박물관에서 피카소-자코메티 쇼 그리고 상하이의 유즈 박물관에서 전시회가 열릴 계획이다.
 
자코메티의 스튜디오와 더불어 파리 14구의 3,770제곱피트짜리 새 공간은, 그 재단의 중심 사업이다. 자코메티는 파리 46번 가로 1926년(그가 25세 일 때)에 온 뒤, 2차 대전 때 잠시 스위스에서 3년을 보낸 시간 말곤 40년을 거기서 살았다. 그 문을 문득 보면, 당신은 여전히 툭 튀어나온 창가와 낡은 공터를 조망하는 넓은 창문의 어느 아틀리에를 볼 수 있다.
 
방문객들은 보호 유리를 통해서, 자코메티가 죽은 1966년 1월 그 이후 그대로인 신비로운 스튜디오를 볼 것이다. 침대는 회반죽과 부서진 파편의 청동상으로 둘러싸였고, 책상은 페인트용 솔과 테레빈유 통으로 덮여 있고, 그의 이젤과 조각상이 서 있으며, 죽음이 훼방 놓은 작품들이 있다.
 
Grenier 씨가 말하길 “우리는 박물관을 열 만한 충분한 돈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대중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공개하고 싶다: 자코메티가 죽은 그 순간부터 그의 아틀리에에 있던 모든 것을.”
 
그녀가 말하길 재단을 운용하는 것은 어려운데, 공개 하지는 않는 자본이 비용을 감당할 만큼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선가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 단체의 연구 프로그램을 후원키로 했으며, 어느 프랑스 건축회사는 그 재단의 창립을 후원키로 했다. Grenier 씨는 미국의 강력한 후원자의 관심을 끌고 싶은데, 뉴욕의 모던 아트 미술관과 뉴욕의 몇몇 수집가들은 자코메티 작품의 초기 구매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재단의 파리 지역 딜러 Mennour 씨는, Grenier 씨가 예술작품과 멀어지는 것을 매우 꺼리며 그를 “재단의 수호자 격”이라고 묘사했다.
 
자코메티의 유산을 잔인하게 위협하는 진흙탕 싸움을 막기 위해, Grenier 씨는 다른 예술가들도 이 사례를 통해 배워서 더 많은 계획을 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예술가 및 그의 작품들의 영구적 보존을 원한다면, 그들이 죽기 전에 그들의 유산이 조직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면서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종민 기자 www.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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