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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가치 조사]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우리가 사는 세상
2015-03-31 11:38:00 2015-03-31 13:19:28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이사장 안치용) 소속 대학생 기자단 YeSS가 2.1지속가능연구소와 함께 현대리서치에 의뢰하여 진행한 <대학생 가치 조사>에서, 62.2%의 대학생이 “동성 간의 결혼도 법률로서 보장받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은 19.8%로 집계되었으며, ‘보통이다’라고 답한 비율은 17.9%였다. 이는 전국 50여 대학 2,348명에게서 조사한 것으로, 100점으로 환산하면 65.4점의 수치를 가지는 값이었다. 이는 대학생들이 동성애를 나름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자료=바람아시아
 
동성애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표면적으론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언급조차 어려웠던 동성애란 키워드가 드라마, 영화, 예능 등에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김조광수 – 김승환 커플은 2013년에 공개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김조광수 커플의 결혼식에 오물이 투척되었고 반대 시위가 거셌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산다는 게 여전히 어려운 일임을 보여준다. 설문조사에서 39%나 되는 개신교의 대학생들이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는 사실만 봐도 동성애자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알 수 있다.
 
현재 성 소수자를 위해 설립된 ‘비온뒤무지개재단’은 1년 넘게 이해할 수 없는 근거로 재단 등록을 거부당하고 있다.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둥, ‘보편적 인권에서 한쪽으로 치우쳐있다.’는 둥의 이유로. 마치 성 소수자의 삶이 비정상적이므로 이를 용인할 수 없다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말임에도 이게 가능한 이유는, 아직도 동성애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이 대부분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진=바람아시아
 
미국의 조사전문기관 퓨 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013년에 조사한 ‘사회는 동성애를 허용해야 하나?(Should society accept Homosexuality?)’라는 질문에서, 한국인들의 39%만이 ‘yes’라고 대답했다. 이에 반해 ‘no’라고 대답한 사람은 59%에 달했다. 스페인, 독일, 캐나다는 80%가 넘는 사람이 ‘yes’라 대답했고, 동성애 논란으로 뜨거운 미국도 60%, 성에 있어 보수적인 폴란드도 42%로 한국보다 높았다. ‘Yes’의 응답비율이 2007년 18%에서 2013년 39%로 증가했다는 사실이나,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동성애에 관한 인식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나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동성애를 혐오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은 주로 어떤 이유로 그들을 배제하는 걸까? ‘남자의 자격’이란 Tv프로에서 동성애에 관한 편견을 드러내는 자막을 보낸 적이 있다. 마치 이성애자를 정상인이고 동성애자는 비정상인인 것처럼 묘사한 자막이었는데, 이러한 시선이 저 질문에 대한 대답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동성애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동성애가 ‘정상이 아니고 그른 것으로, 배제되고 치료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비정상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왜 동성애자들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거기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이며 누가 정하는 걸까?(사진=바람아시아)
 
한국에 ‘왼발 구르고 침 뱉는다’란 속담이 있다. ‘무슨 일에나 처음에는 앞장서서 나서지만 곧 꽁무니를 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왼쪽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왼손은 오랫동안 차별받아왔다. ‘오른손’의 어원은 ‘옳은 손’이란 뜻이었으며, ‘왼손’은 어원적으로 ‘그른 손’이란 뜻이었다. 오른손이 옳고 바른 것, 즉 정상이었다면 왼손은 그른 것, 즉 비정상이었다.
 
한국사회에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왼손잡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만연했다. 왼손잡이 중의 한 명으로서, 시골에서 왼손으로 밥을 먹다가 할머니께 30분 동안 꾸중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전히 왼손잡이를 비정상적인 무언가로 규정하는 어른들이 있긴 하지만, 요즘 사회에선 왼손잡이도 어깨를 좀 펼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인식은 변했다. 오히려 왜 왼손잡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게 익숙해졌다.
 
◇사진=바람아시아
 
과거에 ‘ 오른손 = 정상 ’은 자명한 것이고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면, 이제는 오른손이 어떤 이유로 정상적인 것이 되었는지를 물으며 그 자명한 수식을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사례는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 어떻게 규정되고 설정되는지를 돌아보게 할 시사점을 제공한다. 90%의 오른손잡이가 10%의 왼손잡이를 ‘다르게’ 보는 걸 넘어 ‘잘못된 것’으로 규정해왔던 오랜 역사만큼,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해온 역사도 오래되었다.
 
플라톤의 『향연』만 보아도 고대 그리스인들이 현대와는 다른 시각으로 사랑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을 원래 하나였던 자신의 반쪽을 그리워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설명한다. 원래 인간은 한 쌍으로 되어있었는데, 제우스에 의해 쪼개져 서로를 그리워했고, 여기에서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양분되기 전의 인간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체뿐만 아니라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의 결합체로도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동성애도 자연스러운 범주 안에 들어가는 사랑으로 그려진다.
 
◇그림=바람아시아
 
역사는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으로 흘러갔고, 이내 동성애 =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동성애에 ‘역사’가 있다는 점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많은 한국인은 동성애를 비자연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바라보지만 과연 그런 인식이 타당한 걸까?
 
이성애자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은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때가 있다는 사실은, 이런 질문들이 충분히 가치 있음을 보증한다. ‘동성애 = 비정상’의 수식은 역사에 의해 형성되고 규정된 배제의 논리가 아닐까? 동성애는 어떻게 ‘비정상적인 것’이 되었는가?
 
여기에서 ‘정상’이라는 개념을 고찰해볼 필요가 생긴다. 정상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주요한 특징을 가진다. 첫째, 그것은 상대적 개념이라는 사실이고, 둘째, 정상은 비정상에 의해서만 ‘정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왼손잡이를 비정상으로 보진 않지만, 400년 전만 해도 이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는 역사적 상대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정상’개념은 공간, 문화 부분 등에 있어서도 상대적이다. 특정한 공간과 문화 속에서 정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게 다른 곳에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여기에서 ‘정상’이라고 불리는 게 시공간을 초월한 ‘당연함’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두 번째 특징은 첫 번째 특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상대적이란 말은 ‘정상’이란 개념이 특정한 관계, 관계망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관계란 하나가 아닌 둘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므로, ‘비정상’이 없다면 ‘정상’도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정상은 비정상을 ‘나’와 다른 ‘타자’로 규정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세상에 양(羊)이 단 한 마리만 있다면 그 한 마리를 두고 정상과 비정상을 논할 순 없다. 또한, 모든 양이 흰색이라면 그 ‘흼’에 있어서는 정상과 비정상을 이야기할 순 없다. ‘비정상’은 90%의 양이 흰색이고 10%의 양이 검은색이어야, 그 속에서 흰색과 검은색의 비교가 가능해야 등장한다. 즉, ‘정상’은 ‘비정상’이 있어야만 ‘정상’이 될 수 있다.
 
‘정상’이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면, 그 관계 속에서 정상의 기준은 무엇이며 어떻게 정해지는 걸까? 들판에 90마리의 흰 양이 있고 10마리의 검은 양이 있다는 사실만으론 정상과 비정상이란 개념이 등장하진 않는다. 흰 양이 정상이라는 기준을 상정하고, 검은 양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주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흰 양은 자신들이 정상이고 검은 양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당연한 게 아니라 흰 양이 그렇게 만들고 있던 게 아닐까.
 
◇검은 양을 비정상으로 만드는 주체는 흰양이다.(사진=바람아시아)
  
흰 양은 검은 양을 비정상으로 규정함으로써만 정상이 된다. 여기에서 검은 양을 비정상으로 규정한 흰 양은, 검은 양을 흰색으로 염색시킬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 정상은 ‘정상’이란 이름 아래 비정상을 통제할 권한을 획득하는 것이다.‘정상’이란 타이틀을 거머쥠에서 오는 심리적 만족감과 함께.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향연』에서 자연스럽게 묘사되었던 동성애는 역사 속에서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왔다.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되는 순간 배제되고, 통제되고, 치료를 통해 정상으로 만들어야 할 무언가로 변모한다. 배제하는, 통제하는, 치료하는 주체는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함으로써 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그 정당화는 ‘동성애는 부자연스러운 것,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전제에서 오지만, 사실 그 전제는 당연한 게 아니라 임의적인 것이다. 이성애자들의 의지가 관철되어 ‘만들어진’ 근거일 뿐이다.
 
이렇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이 바로 푸코였다. 그는 ‘동성애 = 비정상’의 수식이 동성애를 혐오하는 권력관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성애주의는 이성애의 권력이 합법화? 합리화되면서 만들어진 근대적 인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푸코의 논의는 섹슈얼리티들에 관한 담론, 지식, 법들이 권력에 의해 사후적으로 형성되었음을 시사한다.
 
◇푸코(사진=바람아시아)
 
동성애에 관대하다고 생각되는 유럽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튜링은, 그 천재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화학적 거세를 받아야 했다. 치료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약물요법, 그는 치료되었을까? 애석하게도 그 끝은 1954년 6월 8일, 그의 자살이었다. 튜링은 자신의 성적 취향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취향이 타인에 의해 치료되거나 변화된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이었다. 이성애자들은 그에게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택할 권리를 앗아가고, 이성애자의 삶을 강요하는 폭력을 저질렀던 게 아닐까.
 
다행히도 푸코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시선이 사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동성애를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국정신의학회는 1973년에, 세계보건기구는 1990년에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했다. 나아가 21세기에는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가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동성애자의 입지가 넓어진 세계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도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료=바람아시아
 
E.H 카는 “자기의 사회적, 역사적 입장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은 자기가 그 상황에서 얼마나 깊이 사로잡혀 있는지를 자각할 수 있는 감수성에 달려있다.”고 했다. 배제와 혐오는 자신의 상황에 깊이 사로잡혀 남을 전혀 이해하고자 하지 않을 때 생겨난다. 다름을 ‘다름’이 아니라 ‘비정상’으로 보는 자세! 소수자들이 조금씩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요즘, 한국 사회에는 어느 때보다 저 ‘감수성’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송윤아 기자 www.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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