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이야기
다마코는 백수다. 대학 졸업 이후, 그녀는 취업을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했다. 아직은 사회에 나갈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쉬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한다든가, 자기계발을 한다든가, 하여간 쉬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다마코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세상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다마코의 삶은,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고 아까운 시간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 삶의 주인은 다마코 자신이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마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마코(사진=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일부)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에서 ‘모라토리움’은 경제 용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경제 용어로서 모라토리움은 신용의 붕괴로 인하여 채무 이행이 어려워지게 된 경우,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서 일정기간 채무의 이행을 연기 또는 유예하는 일을 뜻한다. 한마디로 지불유예기간. 미국의 정신병리학자 E.H.에릭슨은 경제용어인 모라토리움을 사회심리학적인 용어로 해석한 바 있다. 여기서 모라토리움이란 기성 사회에 동화하지 않고, 사회적인 자아(自我)를 확립하는 유예 기간을 의미한다. (앞으로 이 기사에서 말하는 모라토리움은 E.H.에릭슨의 정의를 일컫는다.)
생각해보면, 다마코의 ‘모라토리움’은 순전히 그녀의 아버지 덕분에 가능했다. 1년이라는 유예 기간 동안 다마코는 경제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가 그녀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다마코의 아버지는 딸에게 ‘시간’을 선물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이로써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
- 휴학생 L의 이야기
휴학생 L은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가 정말이지 ‘영화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의 아버지는 일단 다마코의 아버지가 아닐뿐더러, L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추운 겨울 전기장판과 한 몸이 되었다가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잠을 설친다.
사실 그가 휴학을 결정한 이유는 한량처럼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어 공부를 하며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만일 금 같은 시간을 허비했다가는, 취업 면접에서 ‘휴학 동안 무엇을 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만 점짜리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합격이 불투명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취업 8대 스펙(사진=MBC뉴스데스크 캡쳐)
L이 토플 학원을 다니면서 떠오른 의문 한 가지, 이 사람들은 정말 휴(休)학을 하긴 한 걸까? 말 그대로 학업을 쉰다는 뜻인데, 휴학했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학업을 쉬고 있는 사람은 없다. 영어 공부, 취업 준비. 여기에 아르바이트까지 보태서 학교를 다닐 때만큼이나 빡빡한 스케줄을 견뎌낸다.
이 사회에서는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을 하는 것조차 어리석어 보인다. 취업이 하늘에 별 따기인 세상이라, 남들 놀 때 스펙 쌓고 남들 스펙 쌓을 때도 스펙을 쌓아야만 한다. 인턴, 어학연수, 봉사활동, 대외활동, 자격증, 토익, 토플, 할 일이 태산이다. 쉬는 동안에도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남들보다 뒤처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고 싶은 일을 지금 당장 하는 것보다, 하다못해 자격증이라도 따서 훗날 입사할 회사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는 편이 현명하다.
그런데 휴학생 L이 ‘지금’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사실 영어 공부가 아니라,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거나, 하는 스펙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일들뿐이다. 힘겹게 수험 생활을 끝내고 대학에 가면 꼭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겠노라 다짐했으나, 학업이네 아르바이트네 하며 이리저리 치이다 진짜로 하고 싶은 일들을 제대로 하지 못 했다.
게다가 그의 집은 경제적으로 빠듯하다. 빚이 있는 마당에 대학 다니는 자식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은, 이 집안의 부채가 더 늘어날지언정 절대 줄어들 리 없다는 말과 매한가지다. 말이 휴학이지, 근근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용돈을 벌어야 하고, 교환학생에 선발된다면 필요할 생활비까지 스스로 충당해야 한다. 쉴 틈 없다. 휴학하면 상황이 여유로워지겠거니, 이런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었다.
휴학생 L은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없는 걸까.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 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무엇보다 기업이 원하는 무엇을 좇아야만 하는 걸까.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처럼, 그에게도 ‘모라토리움’이 절실하다.
- 모라토리움, 정말 실현 불가능한 것일까.
한국의 학생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쉬지 않고 달린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모의고사와 수능.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시험을 봐야만 하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돌아볼 겨를이 없다.
아마 지금 수능이 끝난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하고 있는 고민은 이것일 터. “어떤 학과에 진학해야 할까?” 자신의 적성을 모르는 학생들은 대개 성적에 맞춰 대학에 진학한다. 어쨌거나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또다시 쉴 틈 없이, 토익, 토플, 인턴, 대외활동, 봉사활동, 자격증, 입사 시험을 준비하며 달린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이와 반대로, 영국은 Gap year라는 제도를 통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1년간의 모라토리움, 즉 유예 기간을 허락한다. 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Gap year는 해외봉사, 인턴, 여행, 워킹홀리데이 등의 프로그램들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며, 학생들이 자기를 돌아보는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제도가 영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아일랜드는 이를 전환학년제라는 이름으로 도입하였고, 학생들의 참여율과 만족도가 높아지자 유럽 전역에서 Gap year를 자국의 실정에 맞게 도입하기 시작했다. 현재 아일랜드, 영국, 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일본도 2011년 JGAP 이라는 이름으로 갭이어 제도를 도입한 바 있다.
◇서핑을 특성화하여 Gap year 기간 동안 사업을 발전시킨 영국의 Lewis와 Hayler(사진=가디언즈 홈페이지 캡쳐)
아일랜드의 전환학생 제도를 마련한 리처드 버크 前 교육부 장관은 말했다. “점수 위주의 경쟁 체제가 점점 심해지면서 학생들은 러닝머신 위에 있는 것처럼 항상 뛰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했고, 엉뚱한 아이디어 하나를 내놓았다. ‘아이들에게 시간을 선물하자!’ 마치 다마코의 아버지가 다마코에게 1년이라는 시간을 선물했던 것처럼, 중등 3학년 과정을 마친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고민할 수 있도록 1년이라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처음에는 학부모들의 반발에 부딪혀 단 3개의 학교에서만 시행된 전환학년 제도. 아이들은 그 시간 동안 교과과목이 아닌 특별과목, 예를 들어 목공 수업이나 연극 수업 등을 들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자 기업, 대학, 봉사단체, 지역 사회가 아이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 이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일랜드 아이들은 말 그대로 휴학을 한 채, 자신의 꿈을 좇는다. 현재 아일랜드 중등학교의 90%가 전환학년 제도를 받아들였다.
◇아일랜드의 전환학생 제도에 관한 EBS 다큐 화면
Gap year제도는 다마코의 아버지와 같다. 이 제도에서는 1년간의 모라토리움 동안 다마코의 아버지가 했던 역할을 교육 기관, 기업, 지역 사회가 대신한다. 배우면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주고 직업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봉사활동을 하며 여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세계의 문제를 직접 체험하고, 더 나아가 자아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학생들은 타국을 여행하며 제2 외국어를 몸소 배울 수 있고,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책에서나 듣고 배우던 ‘다양성’을 경험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나 관습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기간 동안 학생들이 그 누구의 딸도, 아들도 아닌, 오직 ‘나’만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작은 움직임
10대~20대 학생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자아를 찾고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는 일 아닐까. 이를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기다림, 즉 시간이 필요하다. 청춘을 위한 ‘모라토리움’을 실현하고 있는 몇몇 국가들은 자국의 청소년 혹은 청년을 위해, 기다려주기로 했다. 앞서 언급한 영국, 아일랜드, 미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독일, 일본 등의 여러 나라가 학생들에게 제도적으로 1년간의 유예를 허락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한국에서도 ‘갭 이어’라는 사회적 기업이 나타났다. 한국 갭 이어는 학기 및 방학, 휴학 중에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 혹은 청년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사회적기업 파견 갭 이어 프로그램>, <내 손으로 만드는 수제 맥주, 맥주 전문가 브루마스터를 꿈꾸다!>, <크로아티아, 푸른 세상에 사는 돌고래 24시 관찰일지>, <프랑스 파리 가죽공예 인턴쉽>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캄보디아, 베트남 등으로 해외 봉사활동과 여행을 주관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살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서울, 경주, 부산, 제주 등에서 원하는 시간만큼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을 하며, 낯선 타지에서 자신이 살아보고 싶었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 갭 이어에서 진행 중인 프로그램
- 청춘의 모라토리움을 허하라!
낙관은 이르다. 사회적 기업 갭 이어가 개인적인 차원의 유예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의 유예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도적 도입이 절실하다. 우리 사회에도 ‘휴학’이라는 제도가 있지만, 이것은 필자가 이 글에서 언급한 ‘유예기간’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그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 또한 다른 것.
가령, 휴학생 L은 영어 공부를 위해 휴학을 했지, 자아를 찾기 위해 휴학을 한 것이 아니다. 면접에서 ‘휴학 동안 무엇을 하셨나요?’라는 질문에 ‘자아를 찾았습니다.’라는 대답이 오답으로 치부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휴학이 곧 ‘유예기간’을 뜻할 수 없다. 또한, 입학이 연기되는 외국의 상황과 달리 한국의 대학은 입학 연기는커녕, 입학 학기에 휴학하는 것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대부분의 대학은 1학년 1학기 휴학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정적으로 들리겠지만, 이러한 풍토에서 사실상 사회적 기업 갭 이어의 노력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사회적 차원의 Gap year가 가능하려면, 일단 대학에서 입학 연기를 허가해야 한다. 합격 후 등록은 하되, 학생들에게 1년간의 유예기간을 주자는 말이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 되었든 도전할 수 있도록. 다음으로는 갭 이어와 같은 사회적 기업의 노력들이 절실하다. 모든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이고, 보다 다양한 직업 탐색 프로그램, 해외 탐방 프로그램, 봉사활동 프로그램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는 학생들이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경제적인 지원을 담당해야 한다.
휴식은 어리석음이 아니다.
그리고 한 여름 나무 그늘 밑 잔디에 누워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보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설.J.럽복-
무엇보다 쉼에 관한 인식을 바꿔야한다. 사람들은 쉬는 동안에도 바쁘게 움직인다. 달리는 법만 알고 쉬는 법은 몰라서일까. 진즉 사회를 벗어나 자발적 모라토리움을 시행한 바 있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말했다. “젊은이들이 인생을 사는 법을 배우는 데 직접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필요한 그 ‘무엇’은 학점도, 토익 성적도, 자격증도 아니다.
세상으로 나아가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하며 나를 알아갈 기회이다. 우리가 ‘한 여름 나무 그늘 밑 잔디에 누워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보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우리가 세상을 만날 수 있다면, ‘나’를 찾을 수 있다면.
◇tvN 'SNL 코리아' 화면 캡쳐
아프니까 청춘이다, 지겹도록 들었다. 우스갯소리로 ‘아프면 환자’라고들 하는데, 사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보다 농담처럼 내뱉은 저 말에 공감이 간다. 이제는 우리가 ‘왜’ 아픈지를 들여다봐야 할 때가 아닐까. 고등학교 때에는 입시에 치이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스펙 쌓기에 치이고. 우리에게도 다마코의 아버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실은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꿈꾸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라고 믿는 어른들, ‘나’를 찾을 시간을 선물해주는 어른들 말이다. 그러므로 청춘의 모라토리움을 허하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위로의 말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어떤 대학의 학생도, 모 기업의 취업 준비생도 아닌, 온전히 나만의 내가 될 수 있는 시간이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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